하얀 비명
크리스마스 아침, 세상은 하얗다.
여자는 걷는다. 아니, 달린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밭을 헤치며 앞으로, 앞으로만. 숨이 차오른다. 폐가 얼어붙는 것 같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멈추면 그 순간, 지난밤의 적막이 다시 덮쳐올 것이다. 텅 빈 아파트. 아이 방에 남은 장난감 하나. 옷장 속 남편의 빈 옷걸이들.
그녀는 더 빨리 뛴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눈발이 얼굴을 때린다. 속눈썹에 눈이 쌓이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왜 뛰는지도 모른다. 그저 이 몸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다는 감각만이 그녀가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발이 무언가에 걸린다.
순간, 세상이 기울어진다. 무릎이 먼저 땅에 닿는다. 눈 속에 묻혀 있던 돌덩어리가 슬개골을 정확히 강타한다.
“으윽—”
신음이 새어 나온다. 무릎에서 뜨거운 것이 번진다. 피다. 바지가 찢어졌다. 하얀 눈 위로 붉은 점이 번져간다. 통증이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날카롭고, 선명하고, 생생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프다. 분명 아프다. 하지만 그 고통의 한가운데서 묘한 무언가가 피어오른다. 쾌감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 그보다는 안도에 가깝다. 이 통증은 진짜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야”라고 위로하지 않는다. 그저 아프다고, 정직하게 말한다.
여자는 쓰러진 채로 웃는다.
입술이 벌어지고, 하얀 이빨 사이로 눈송이가 들어온다. 차갑다. 혀 위에서 녹는 눈은 놀랍도록 시원하다. 개운하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물줄기가 속을 씻어내는 것 같다. 지난 일 년간 삼켰던 모든 말들, 참았던 모든 울음이 이 차가움에 얼어 굳어버리는 것 같다.
그녀는 입을 더 크게 벌린다. 눈을 먹는다. 하늘이 그녀의 입 속으로 쏟아져 내린다.
“하, 하하…”
웃음이 터져 나온다. 눈밭에 얼굴을 처박고 웃는다. 무릎에서 피가 흐른다. 손가락 끝이 얼어붙는다. 배가 고프다. 언제 마지막으로 밥을 먹었던가. 어제? 그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난다.
이 소리마저 반갑다. 살아있는 소리다. 몸이 그녀에게 말을 건다. “나 여기 있어. 나 아직 살아있어. 나 배고파.”
남편은 없다. 아이도 없다. 엄마도 언니도 없다. 친구들은 연락이 없다. 아니, 그녀가 연락을 끊었다. 크리스마스 가족사진들을 견딜 수 없어서.
최악이다. 이보다 더 바닥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바닥이 단단하다.
눈 속 돌덩어리처럼 단단하다. 무릎을 찢을 만큼 날카롭지만, 적어도 진짜다.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해”라고 속삭이다가 어느 날 “미안해”로 바뀌는 말들과 다르다.
여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무릎이 욱신거린다. 찢어진 바지 사이로 피와 눈이 범벅이 되어 있다. 손으로 눈을 쓸어내니 피가 더 번진다. 붉고 하얀 것이 뒤섞인다.
아름답다, 고 그녀는 생각한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이 순간, 이 고통이, 이 추위가, 이 배고픔이, 모두 그녀의 것이다.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 설명할 필요도, 사과할 필요도 없다.
저 멀리, 마을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인다. 아마 지금쯤 사람들은 따뜻한 집 안에서 가족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있을 것이다. 찜닭 냄새. 아이들의 웃음소리. 트리에 반짝이는 불빛.
여자는 그쪽을 보지 않는다.
대신 다시 눈밭을 바라본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지평선. 방향도 없고 길도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이 자유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다친 무릎을 질질 끌며, 한 발 한 발. 입안에 고인 눈을 삼키며. 배고픔을 느끼며. 추위에 떨며.
살아있음을 느끼며.
하얀 크리스마스가 그녀를 삼킨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기꺼이 삼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