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것들
아침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시작된다.
아이가 운다. 나는 눈을 뜬다. 시계는 여섯 시 반을 가리킨다. 옆자리는 비어 있다.
준서는 이미 일어나 서재에 있을 것이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스케치를 한다고 했다. 무슨 프로젝트인지는 묻지 않는다. 묻는다고 대답하지도 않는다.
“엄마 왔어.”
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나를 본다. 두 살. 아직 말을 많이 하지 못한다. 하지만 표정으로 말한다. 배고프다고. 기저귀가 젖었다고. 엄마가 필요하다고.
나는 아이를 안아 올린다. 무겁다.
처음 안았을 때보다 훨씬 무겁다. 아이는 자라고 있다. 나도 함께 자라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그냥 늙어가고 있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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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 씨는 행복하시겠어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번역가라는 직업, 건축가 남편, 예쁜 집, 귀여운 아이. 겉으로 보면 다 있다. 빠진 게 없다. 완벽하다.
하지만 완벽함과 행복은 다른 거다.
나는 그걸 매일 아침 확인한다. 빈 침대를 보면서. 닫힌 서재 문을 보면서. 대답 없는 “잘 잤어?“를 들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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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아침을 먹인다.
준서가 서재에서 나온다. 머리가 산발이고, 얼굴에 피곤함이 있다. 그는 커피를 따르고 식탁에 앉는다.
“잘 잤어?”
내가 묻는다.
“응.”
그가 대답한다. 짧게. 그는 항상 짧게 대답한다.
나는 더 묻지 않는다. 묻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세계에 산다.
“오늘 미팅 있어?”
“응. 오후에.”
“몇 시에 들어와?”
“모르겠어. 늦을 수도.”
항상 이렇게 말한다. 늦을 수도. 그리고 실제로 늦는다. 나는 혼자 아이를 재운다. 혼자 설거지를 한다. 혼자 어둠 속에 앉아 있는다.
준서는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선다. 샤워를 하러 간다. 나는 아이의 얼굴을 닦는다. 아이는 웃는다. 나도 웃는다.
이것이 우리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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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서를 만났을 때, 나는 스물여덟이었다.
늦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결혼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소개팅을 주선했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준서는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건축가래. 작은 사무소 운영하는데, 재능 있대. 나이는 너보다 두 살 위.”
친구가 말했다.
“잘생겼어?”
나는 웃으며 물었다.
“봐. 사진.”
사진 속의 준서는 괜찮아 보였다. 잘생겼다기보다는, 감각적이었다. 검은색 옷, 뿔테 안경, 약간 긴 머리. 건축가처럼 보였다.
우리는 만났다.
카페에서. 준서는 예의 바르고 조용했다. 많이 웃지 않았다. 하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열정적으로는 아니었지만, 진지하게.
“공간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는 않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남자가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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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만났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대화는 편했다. 준서는 말이 많지 않았지만,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번역 이야기를 했다. 어려운 문장, 표현할 수 없는 뉘앙스, 마감의 압박.
“힘들겠어요.”
그가 말했다.
“괜찮아요. 익숙해요.”
나는 대답했다.
다섯 번째 만남 후, 우리는 잤다.
계획한 건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계획한 건지도 모른다. 우리 둘 다. 말하지 않았을 뿐.
준서의 집에서. 그가 설계했다는 작은 원룸에서.
섹스는 괜찮았다.
나쁘지 않았다. 특별하지도 않았지만.
“또 만날까요?”
준서가 물었다.
“응.”
나는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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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만났다.
일주일에 한두 번. 대부분 준서의 집에서.
우리는 잤다. 이야기를 나눴다. 밥을 먹었다. 영화를 봤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준서도, 나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랑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편한 관계면 충분하다고.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나는 혼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준서와 함께 있을 때도.
그는 옆에 누워 있었지만, 멀었다. 그는 내 손을 잡았지만, 느슨했다. 그는 나를 안았지만, 진심은 없었다.
“뭐 생각해?”
내가 물으면,
“아무 생각 안 해.”
그가 대답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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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이 지났을 때, 준서는 상을 받았다.
젊은 건축가상.
나는 시상식에 갔다. 준서는 무대에 올라가 상을 받았다. 짧은 소감을 말했다. 나는 객석에 앉아 박수를 쳤다.
시상식 후, 사람들이 준서에게 몰려들었다. 축하한다고, 앞으로 기대된다고, 인터뷰 요청을 하고 싶다고.
나는 구석에 서서 지켜봤다.
준서는 쑥스럽게 웃으며 명함을 주고받았다. 그는 빛났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나는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준서는 나를 보지 않았다.
아니, 봤지만, 본 척하지 않았다.
누군가 물었다.
“여자친구 안 왔어요?”
준서는 잠깐 멈췄다.
“아, 바빠서요.”
그가 대답했다.
나는 5미터 앞에 서 있었다.
준서는 나를 보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사람들이 준서 주변에서 웃고 떠들었다. 샴페인 잔이 부딪치는 소리. 축하의 박수.
나는 그 소리들 속에서 혼자였다.
“저 사람 여자친구예요?”
누군가 내게 물었다.
나는 멈췄다.
여자친구?
우리는 그런 관계였나?
“아니요.”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돌아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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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받은 후, 준서는 바빠졌다.
프로젝트가 들어왔다.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매거진에 실렸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만나는 횟수가 줄었다.
일주일에 한 번, 2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나는 서운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뭐가 달라질까. 준서는 바빴다. 나도 이해했다. 이해해야 했다.
어느 날, 준서가 말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알아봐.”
“그렇겠다.”
“그래서… 당분간 밖에서는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무슨 말이야?”
“같이 다니는 거. 사진 찍히는 거. 그런 거.”
나는 그를 봤다.
“왜?”
“이미지 관리 때문에. 지금이 중요한 시기거든.”
이미지.
나는 그의 이미지에 안 맞는 사람이었다.
“알았어.”
나는 대답했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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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임신했다.
생리가 늦었다.
처음에는 스트레스라고 생각했다. 번역 마감이 겹쳤고, 잠을 제대로 못 잤고, 몸이 피곤했다.
하지만 2주가 지나도 생리는 오지 않았다.
나는 테스트기를 샀다.
화장실에서, 혼자, 떨리는 손으로.
두 줄.
나는 변기 뚜껑을 닫고 앉았다.
한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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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서에게 전화했다.
“만날 수 있어?”
“지금? 미팅이 있어서…”
“중요한 얘기야.”
준서는 잠시 침묵했다.
“알았어. 저녁에.”
우리는 만났다.
준서의 집에서. 그는 피곤해 보였다. 미팅이 길었나 보다.
“무슨 일이야?”
그가 물었다.
나는 테스트기를 꺼냈다.
준서는 그걸 봤다. 표정이 굳었다.
“임신했어.”
내가 말했다.
“8주.”
준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뭐?”
침묵.
긴 침묵.
준서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머리를 감쌌다.
“어떡해.”
그가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가 아니라, “어떡해”.
“사람들이 알면…”
그가 말했다.
“뭐?”
나는 물었다.
“지금 한창 뜰 때인데. 이미지가 중요해. 결혼도 안 한 상태에서 임신 소식이 나가면…”
나는 그를 봤다.
그는 나를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자기 이미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결혼하면 되잖아.”
내가 말했다.
준서는 고개를 들었다. 나를 봤다.
그의 눈에는 거부가 있었다.
나와 결혼한다는 것.
나를 자기 여자로 세상에 밝힌다는 것.
그게 싫은 거였다.
“그래야겠네.”
그가 말했다.
의무감만 있었다.
사랑은 없었다.
나는 착각했다.
아이가 생기면 달라지겠지.
준서가 아빠가 되면, 우리가 진짜 가족이 되면,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되겠지.
아니,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우리가 진짜 관계가 되겠지.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준서는 한 가지를 강하게 주장했다.
“기사 내지 말자.”
“뭐?”
“결혼 기사. 매거진 인터뷰. 그런 거 다 하지 말자.”
나는 이해가 안 됐다.
“왜? 사람들이 궁금해할 텐데.”
“그게 싫어.”
준서가 말했다.
“사생활을 노출하고 싶지 않아. 일과 사생활은 분리하고 싶어.”
그럴듯한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진짜 이유는 다르다는 걸.
나와의 결혼이 알려지는 게 싫은 거였다.
“그 건축가”가 “평범한 여자”랑 결혼한다는 게.
이미지에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거였다.
하지만 준서의 부모님이 원했다.
“당연히 기사 내야지. 아들이 상 받은 건축가인데. 좋은 이미지 아니야?”
준서는 거부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었다.
결혼 기사가 났다.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인터뷰도 했다.
준서가 설계한 공간에서 사진을 찍었다.
촬영 내내, 준서는 불편해했다.
사진사가 말했다.
“좀 더 다정하게. 신부님 어깨에 손 올려주세요.”
준서는 마지못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차가웠다.
“웃어주세요. 행복하게!”
준서는 웃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사진은 예쁘게 나왔다.
사람들은 댓글을 달았다. “완벽한 커플.” “부럽다.” “건축가 남편 멋있어요.”
나는 그 댓글들을 읽으며 위안을 얻었다.
적어도 사진 속에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결혼했다.
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기대했다. 준서가 달라지기를.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준서는 아이를 안았다. 하지만 아빠처럼 안지 않았다. 의무감으로 안았다.
기저귀를 갈았다. 하지만 마지못해 했다.
밤에 아이가 울면, 못 들은 척했다.
“준서야.”
내가 불렀다.
“응.”
“아이 좀 봐줄래?”
“지금? 작업 중인데…”
“나도 피곤해.”
“알았어.”
그는 일어났다. 하지만 짜증이 묻어 있었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이게 네가 원한 게 아니라는 거 나도 안다고.
나도 원하지 않았다고.
우리 둘 다 착각했다고.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진짜 끝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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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대화하지 않았다.
준서가 차갑게 굴 때도.
준서가 늦게 들어올 때도.
준서가 내 말을 듣지 않을 때도.
나는 참았다.
대화하면 진짜 현실을 마주해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처음부터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
우리가 그냥 편의상 만난 사람들이었다는 것.
나는 그 현실이 무서웠다.
그래서 외면했다.
지금도 준서는 내가 SNS에 사진을 올리는 걸 싫어한다.
“또 올리는 거야?”
준서가 물었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응. 오늘 아이랑 공원 갔었거든.”
“나는 좀 빼줘.”
“왜?”
“그냥. 사생활 노출하고 싶지 않아.”
나는 웃었다.
“공인도 아니면서.”
“그래도.”
준서는 자리를 떴다.
나는 사진을 본다.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
준서는 프레임 밖에 있다.
항상.
그는 내 사진에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의 남편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나는 준서가 찍힌 사진을 올린다.
뒷모습이라도. 손이라도. 멀리서 찍힌 모습이라도.
“건축가 남편”이라는 캡션과 함께.
그럼 댓글이 달린다.
“남편분 멋있어요.”
“건축가시죠?”
“부럽습니다.”
“좋은 가족이네요.”
나는 그 댓글들을 읽는다.
하나하나 천천히.
그리고 믿는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준서가 내 남편으로 보인다는 걸.
우리가 가족으로 보인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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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나는 SNS에 사진을 올렸다.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
우리가 함께 사는 집 사진.
“행복한 하루.”
“감사한 일상.”
“우리 가족.”
댓글이 달렸다.
“행복해 보여요.”
“건축가 남편 부러워요.”
“집 너무 예뻐요.”
“좋은 가족이네요.”
나는 그 댓글들을 읽었다.
하나하나 천천히.
그리고 믿으려고 했다.
우리가 정말 행복하다고.
적어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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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 시.
아이는 낮잠을 자고, 나는 노트북 앞에 앉는다. 번역 원고. 마감은 일주일 후다. 하지만 나는 아직 반도 못 했다.
집중이 안 된다.
문장을 읽는다. 영어로 쓰인 문장. 한국어로 옮긴다.
*“She lived in a beautiful lie, because the truth was unbearable.”*
그녀는 아름다운 거짓 속에 살았다. 진실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멈춘다.
이 문장을 다시 읽는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웃는다. 쓴웃음.
이거 내 이야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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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이 울린다.
은서다. 내 친구. 변호사. 우리는 대학 동기다.
“아라야, 시간 돼?”
“응.”
“저녁 같이 먹을래? 오랜만에.”
나는 잠시 생각한다. 준서는 오늘 늦는다고 했다.
“좋아.”
“어디서?”
“네가 편한 데.”
“그럼 우리 동네에서. 일곱 시?”
“응.”
전화를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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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일곱 시.
나는 엄마에게 아이를 맡긴다. 엄마는 근처에 산다. 다행이다. 엄마가 없었으면 나는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다.
“늦지 마.”
엄마가 말한다.
“응. 금방 올게.”
레스토랑은 동네 안에 있다. 이탈리안. 은서는 이미 와 있다. 와인을 주문해 놓았다.
“언니.”
나는 그녀를 안는다.
“잘 지냈어?”
“응. 넌?”
“그냥 그래. 바빠.”
우리는 앉는다. 와인을 마신다. 메뉴를 본다. 주문한다.
“준서는?”
은서가 묻는다.
“프로젝트 미팅.”
“요즘도 바빠?”
“응.”
나는 짧게 대답한다.
은서는 더 묻지 않는다. 그녀는 안다. 내가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우리는 음식을 먹는다. 파스타, 샐러드, 빵.
“너 행복해 보여.”
은서가 말한다.
나는 멈춘다. 포크를 내려놓는다.
“뭐가?”
“SNS 보면. 준서랑 아이랑. 집도 예쁘고. 행복해 보여.”
나는 웃는다. 쓴웃음.
“고마워.”
침묵이 흐른다.
“진짜야?”
은서가 묻는다. 조심스럽게.
나는 와인을 마신다. 한 모금. 크게. 그리고 대답한다.
“잘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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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야.”
은서가 말한다.
“응.”
“너 준서 사랑해?”
나는 멈춘다.
사랑?
나는 준서를 사랑하는가?
사랑한 적이 있었나?
“잘 모르겠어.”
나는 대답한다. 솔직하게.
“처음부터… 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아. 그냥 편했고, 괜찮았고, 나이도 있었고.”
“그럼 왜 결혼했어?”
“임신했으니까.”
나는 말한다.
“그리고… 착각했어. 아이가 생기면 달라지겠지. 우리가 진짜 가족이 되겠지. 준서가 나를… 아니,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소중하게 여기게 되겠지.”
“달라졌어?”
“아니.”
나는 웃는다.
“아무것도 안 바뀌었어. 준서는 여전히 멀고, 나는 여전히 혼자고.”
“그럼 왜 계속 있어?”
은서가 묻는다.
나는 와인 잔을 본다. 붉은 와인이 천천히 흔들린다.
“무서워.”
내가 말한다.
“뭐가?”
“혼자가. 진짜 혼자가 되는 게.”
나는 고개를 든다. 은서를 본다.
“지금도 혼자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아니잖아. 사람들이 보기에는 나는 건축가의 아내고, 아이 엄마고, 행복한 가족이잖아.”
“그게 중요해?”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상하지? 사랑은 없는데, 타이틀은 중요한 거. 관계는 끝났는데, 외부의 시선은 필요한 거.”
은서는 나를 본다. 판단하지 않는 눈빛.
“이상하지 않아.”
그녀가 말한다.
“우리 다 그런 거 아닐까. 뭔가에 기대서 사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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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래 앉아 있다.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의 외로움을 숨긴다.
열 시가 넘어 헤어진다. 나는 엄마 집에 들러 아이를 데려온다. 아이는 자고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아 집으로 온다.
거실 불은 꺼져 있다.
준서는 아직 안 왔다. 나는 아이를 재운다. 침대에 눕힌다. 이불을 덮어준다.
나는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는다.
불을 켜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나는 창밖을 본다.
핸드폰을 본다.
준서에게서 문자가 왔다. “늦어. 먼저 자.”
나는 답장하지 않는다.
대신 SNS를 연다.
오늘 찍은 사진을 올린다. 아이가 거실에서 웃고 있는 사진. 준서가 설계한 공간 안에서.
캡션을 쓴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올리고 나서,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댓글이 달리기 시작한다. 하트가 눌린다.
“행복해 보여요.”
“부러워요.”
“예쁜 집이네요.”
나는 그 말들을 읽는다.
그리고 믿는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이것이 행복이라고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