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균열의 문장ㅣ7장 스폰

명확한 제안

by 한서

그 후 우리는 더 자주 만났다.


일주일에 두 번, 세 번.


호텔 바. 레스토랑. 갤러리 카페.


가끔은 낮에도 만났다. 도현이 회의 중간에 시간을 냈다.


“한 시간 있어.”


도현이 말했다.


“어디서 만날까요?”


“호텔.”


우리는 만났다.


섹스했다.


그리고 헤어졌다.


3개월이 지났다.


나는 도현 없이는 하루도 못 살 것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도현 생각.


일할 때도 도현 생각.


밤에 잠들기 전에도 도현 생각.


나는 중독됐다.


도현에게.


어느 날 저녁.


도현이 말했다.


“은서야.”


“응.”


“이야기 좀 하자.”


우리는 호텔 라운지 바에 있었다.


도현의 표정이 진지했다.


“무슨 일이에요?”


“우리 관계 말이야.”


나는 긴장했다.


“뭐요?”


“이대로 계속 가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숨이 멎었다.


끝내려는 건가.


“왜요?”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위험해. 너무 자주 만나니까.”


도현이 말했다.


“언제 들킬지 몰라.”


“그럼…”


“명확하게 하고 싶어.”


도현은 나를 똑바로 봤다.


“우리 관계를.”


나는 기다렸다.


도현이 무슨 말을 할지.


“나는 너를 계속 만나고 싶어.”


도현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처럼은 안 돼.”


“무슨 뜻이에요?”


“정리하고 싶어. 우리 관계를.”


도현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결혼했어. 이혼할 생각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너도 알잖아.”


“네.”


“그래서.”


도현이 말했다.


“제안하고 싶어.”


“원룸 하나 얻어줄게.”


도현이 말했다.


나는 그를 봤다.


“뭐라고요?”


“네 명의로. 내가 계약금이랑 월세 낼게.”


“왜요?”


“거기서 만나자. 호텔 말고.”


도현이 설명했다.


“호텔은 위험해. 카드 내역 남고, 사람들 눈에 띄고.”


“그래서 집을 얻어주겠다고요?”


“응.”


도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안전해.”


나는 말이 안 나왔다.


“그리고.”


도현이 계속했다.


“생활비도 줄게. 매달.”


“생활비요?”


“응. 얼마면 될까. 300? 500?”


“도현 씨.”


내가 말을 끊었다.


“이게 뭐예요?”


“뭐긴. 우리 관계 정리하는 거지.”


도현이 말했다.


“명확하게.”


나는 화가 났다.


“이게 거래예요?”


“거래라기보다는…”


“돈 주고 저 사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도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나는 그를 봤다.


“제가 뭐예요? 애인이에요, 아니면 뭐예요?”


“애인이지.”


도현이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거야. 안전하게.”


“안전하게요?”


“응. 너도 나도.”


도현은 내 손을 잡았다.


“은서야. 화낼 일 아니야.”


“화낼 일 아니에요?”


“응. 나는 너 생각해서 하는 거야.”


“제 생각이요?”


“응. 너 혼자 사니까 불안하잖아. 집도 전세고. 월급도 빠듯하고.”


도현이 말했다.


“내가 도와주고 싶어.”


나는 웃었다.


황당해서.


“도와주고 싶으세요?”


“응.”


“돈으로요?”


“그게 제일 확실하잖아.”


도현은 진지했다.


“은서야. 나는 진심이야. 너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럼 이건 뭐예요?”


“실용적인 해결책이지.”


도현이 말했다.


“나는 너를 계속 보고 싶어. 하지만 안전하게. 명확하게.”


“그래서 돈을 주겠다고요?”


“응.”


도현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게 문제야?”


나는 도현을 봤다.


예순둘 살의 남자.


성공한 회장.


자기 기준이 확실한.


그는 진심이었다.


사랑한다고 했지만,


동시에 거래를 제안했다.


모순이 아니었다.


도현에게는.


“생각해봐.”


도현이 말했다.


“급하게 대답 안 해도 돼.”


“얼마나요?”


내가 물었다.


“뭐?”


“생활비요. 얼마 주실 건데요?”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500 어때?”


“500만 원이요?”


“응. 매달. 적어?”


“많아요.”


내가 말했다.


“제 월급보다 많아요.”


“그럼 딱 좋네.”


도현이 웃었다.


“일 덜 해도 되겠다.”


나는 와인을 마셨다.


한 모금.


크게.


“조건이 뭐예요?”


내가 물었다.


“조건?”


“네. 500 주시면서 원하는 게 뭐예요?”


도현은 나를 봤다.


“일주일에 세 번 만나자.”


“세 번이요?”


“응. 화, 목, 토.”


도현이 말했다.


“화요일이랑 목요일은 저녁. 토요일은 낮.”


“부인한테는요?”


“화목은 회식이라고 하고, 토요일은 골프.”


도현은 이미 다 계획한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남자 만나지 마.”


“당연하죠.”


“당연하지 않아. 명확히 해야지.”


도현이 말했다.


“나는 독점하고 싶어. 너를.”


나는 그 말이 좋았다.


독점.


이상하게도.


“알겠어요.”


내가 말했다.


“진짜?”


도현이 놀란 것 같았다.


“빨리 결정했네?”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저도 도현 씨 계속 보고 싶으니까.”


“좋아.”


도현이 웃었다.


“그럼 다음 주부터 집 알아보자.”


“네.”


“어디가 좋아? 강남? 서초?”


“아무 데나요.”


“그래도 네가 좋아하는 데로.”


도현이 말했다.


“네 집이니까.”


우리는 헤어졌다.


호텔 앞에서.


도현이 나를 안았다.


“은서야.”


“응.”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뭐요?”


“돈 주는 거.”


도현이 말했다.


“나는 진심이야. 사랑하는 거.”


“알아요.”


“돈이랑은 별개야.”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알았다.


돈이랑 사랑은 별개가 아니라는 걸.


도현에게는.


그리고 어쩌면 나에게도.


집에 돌아왔다.


나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나는 방금 뭘 한 거지.


거래를 받아들였다.


원룸. 월세. 생활비 500.


일주일에 세 번.


이게 뭐지.


애인?


정부?


아니면 그냥,


사랑?


도현에게서 문자가 왔다.


“집 들어갔어?”


“응.”


“오늘 놀랐지?”


“조금요.”


“미안해. 갑자기 말해서.”


“괜찮아요.”


“근데 은서야.”


“응.”


“나 진심이야.”


도현이 썼다.


“돈 때문에 하는 거 아니야. 너 때문이야.”


나는 핸드폰을 봤다.


너 때문이야.


“알아요.”


내가 답장했다.


“저도 도현 씨 때문이에요.”


“좋아.”


“근데 도현 씨.”


“응.”


“이게… 정말 괜찮은 거예요?”


나는 물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게.”


잠시 답이 없었다.


그리고,


“모르겠어.”


도현이 솔직하게 답했다.


“괜찮은지는. 근데 멈출 수가 없어.”


“저도요.”


“그럼 됐어.”


도현이 썼다.


“우리 둘 다 원하면, 그게 정답이야.”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나는 생각했다.


이게 사랑일까.


거래 같은.


계약 같은.


하지만 동시에,


절실한.


멈출 수 없는.


나는 눈을 감았다.


도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회색 머리. 깊은 주름.


“독점하고 싶어. 너를.”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나는 알았다.


이미 독점당했다는 걸.


돈을 받기 전부터.


계약하기 전부터.


나는 이미 도현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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