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시간
도현에게서 마지막 문자가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계좌번호 보내.”
나는 보냈다.
다음 날 500만 원이 입금됐다.
그게 전부였다.
나는 은서다.
서른다섯.
변호사.
로펌 7년차.
내년이면 파트너 심사를 받는다.
아니, 받을 예정이었다.
임신 8주.
혼자.
거울을 봤다.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나는 멈췄다.
이게 내가 꿈꾼 모습인가.
로스쿨 들어갈 때,
변호사 되고 싶었다.
성공하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그리고 결혼.
아이.
다 가지고 싶었다.
능력 있는 변호사.
사랑하는 남편.
예쁜 아이 둘.
그걸 꿈꿨다.
하지만 지금.
거울 속의 나는,
미혼모였다.
숨겨진 애인의 아이를 혼자 키우게 될.
이건 아니었는데.
회사에 말했다.
“임신했어요.”
팀장이 물었다.
“축하해요. 결혼해요?”
“아니요.”
“…아.”
팀장의 표정이 굳었다.
“그럼 어떻게 할 거예요?”
“낳을 거예요.”
“혼자요?”
“네.”
침묵이 흘렀다.
팀장은 서류를 봤다.
나를 보지 않고.
“파트너 심사는요?”
“미룰 수밖에 없겠죠.”
“그렇겠네요.”
팀장은 말했다.
“휴직 신청하세요. 출산휴가는 3개월이에요.”
“알겠습니다.”
그게 전부였다.
나는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7년.
7년 준비했는데.
이제 미뤄진다.
언제까지?
복귀해도 달라진 건 없다.
미혼모.
아이 키우며 일하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거울을 봤다.
화장한 얼굴.
정장 입은 몸.
능력 있어 보이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하지만 나는 알았다.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내가 꿈꾼 삶이.
나는 화장을 고쳤다.
립스틱을.
겉으로는 괜찮은 척.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응. 왜?”
“나… 임신했어.”
전화기 너머로 침묵.
“뭐라고?”
“임신이야. 8주.”
“누구 아이야?”
“그건… 말 못 해.”
“은서야. 너 미쳤어?”
엄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혼도 안 하고 임신을? 아빠는 뭐야?”
“말 못 해.”
“왜 못 해?”
“복잡해.”
“복잡하긴 뭐가 복잡해! 유부남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은서야. 너 그렇게 똑똑한데. 왜 이래.”
그렇게 똑똑한데.
나는 그 말이 아팠다.
“미안해.”
“미안하긴. 지워.”
“싫어.”
“은서야. 너 지금까지 뭐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어? 이러면 다 망가져.”
“알아.”
“알면서 왜 그래?”
“…낳고 싶어.”
엄마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서야.”
“응.”
“너 정말 그럴 거야? 혼자 키우면서 일하고?”
“응.”
“할 수 있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할 수 있을까.
정말.
동기 민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은서야. 들었어.”
“뭘?”
“임신. 축하해.”
“…고마워.”
“근데 결혼은 안 해?”
“응. 복잡해.”
민지는 잠시 침묵했다.
“은서야. 괜찮아?”
“응.”
“거짓말. 목소리 이상해.”
나는 울었다.
“민지야.”
“응.”
“나 망한 것 같아.”
“왜?”
“다 미뤄졌어. 휴직 들어가야 돼.”
“복귀하면 되지.”
“미혼모인데? 아이 키우면서?”
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 둘 다 알았으니까.
어렵다는 것을.
나는 생각했다.
내가 원했던 건.
능력 있는 변호사.
인정받는 것.
성공.
그리고 결혼.
사랑하는 남편.
아이.
다 가지고 싶었다.
로스쿨 동기들 보면,
결혼했다.
변호사 하면서.
아이 낳고.
남편이 육아 분담하고.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나도.
하지만 지금.
나는 미혼모다.
숨겨진 애인의 아이를 혼자 키우게 될.
이게 아니었는데.
병원에 갔다.
혼자.
산부인과.
대기실에 앉았다.
주변을 봤다.
임산부들.
모두 남편이 있었다.
옆에 앉아서.
손 잡아주고.
웃으며 이야기하고.
나는 혼자였다.
핸드폰만 보며.
“보호자 안 오셨어요?”
간호사가 물었다.
“혼자예요.”
“아. 네.”
간호사의 눈빛.
동정.
나는 그게 싫었다.
초음파.
의사가 화면을 봤다.
“12주 됐네요. 건강해요.”
“다행이네요.”
“다음 달에 또 오세요. 보호자 분이랑 같이 오세요.”
“혼자예요.”
“아. 그러세요?”
의사는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 표정.
안됐다는.
나는 초음파 사진을 받았다.
작은 점 같은.
하지만 사람 모양인.
내 아이.
도현의 아이.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서.
부부가 걸어갔다.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여기 봐. 우리 아기.”
“우와. 진짜 신기하다.”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나는 혼자 초음파 사진을 봤다.
축하해줄 사람도 없이.
서초동 오피스텔에 혼자 있었다.
도현이 마련해준 집.
이제는 내 집.
도현은 오지 않았다.
한 달째.
전화도 문자도 없었다.
매달 1일에 500만 원만 입금됐다.
그게 전부였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생각했다.
내가 꿈꾼 삶.
능력 있는 변호사.
사랑하는 남편.
아이.
하나도 없다.
변호사는 휴직했다.
남편은 없다.
아이는 있지만 혼자 키워야 한다.
이게 아니었는데.
나는 울었다.
“왜 이렇게 됐지.”
나는 똑똑했다.
능력 있었다.
욕망도 있었다.
다 가지고 싶었다.
성공도.
사랑도.
가정도.
근데 왜.
왜 이렇게 됐지.
16주.
배가 조금 나왔다.
헐렁한 옷을 입었다.
회사에 잠깐 들렀다.
서류 정리하러.
복도를 걸었다.
사람들이 봤다.
내 배를.
속삭임이 들렸다.
“은서 변호사 임신했대.”
“누구 아이래?”
“모르겠대. 말 안 한대.”
“유부남 아닐까?”
“파트너 심사 물 건너갔네.”
“미혼모인데 누가 승진시켜.”
나는 걸음을 멈췄다.
미혼모인데 누가 승진시켜.
화장실로 뛰어갔다.
칸 안에 들어가서.
울었다.
7년.
7년 준비했는데.
다 무너졌다.
집으로 돌아왔다.
거울을 봤다.
정장을 벗었다.
이제 입을 일도 없겠지.
한동안.
아니, 어쩌면 영원히.
나는 배를 봤다.
조금 나온.
“아가야.”
내가 말했다.
“엄마 다 잃었어.”
대답은 없었다.
“엄마는 성공하고 싶었어. 인정받고 싶었어. 결혼도 하고 싶었고.”
나는 울었다.
“근데 이렇게 됐어. 혼자 너 키우게 됐어.”
이게 아니었는데.
민지가 찾아왔다.
“은서야.”
“왜 왔어?”
“보고 싶어서.”
민지는 들어왔다.
우리는 소파에 앉았다.
“어때?”
민지가 물었다.
“망했어.”
“왜?”
“다 잃었어. 커리어, 계획, 다.”
“복귀하면 되잖아.”
“미혼모가?”
나는 웃었다.
쓴웃음.
“민지야. 현실적으로 생각해봐. 미혼모가 애 키우면서 변호사 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밤샘 작업, 주말 출근, 클라이언트 미팅.”
민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승진? 미혼모를 위로 올려줄 것 같아? 로펌 이미지 생각해서라도 안 해줄 거야.”
“은서야.”
“나 망한 거야. 알아.”
나는 울었다.
“똑똑하다고 했잖아. 능력 있다고 했잖아. 근데 이렇게 됐어.”
민지가 말했다.
“은서야. 그래도 넌 할 수 있어.”
“뭘?”
“일. 변호사.”
“어떻게?”
“복귀해. 아이 어린이집 보내고. 힘들겠지만.”
“위로 올라가는 건?”
“…포기해야 할 수도 있어.”
민지가 솔직하게 말했다.
“근데 변호사는 할 수 있어. 계속.”
나는 고개를 숙였다.
포기.
7년 준비한.
내 꿈.
“이게 아니었는데.”
내가 말했다.
“뭐?”
“내가 꿈꾼 삶이. 능력 있는 변호사, 사랑하는 남편, 아이. 다 가지는 거였어.”
“알아.”
“근데 하나도 제대로 된 게 없어. 변호사는 휴직했고, 남편은 없고, 아이는 있지만 혼자 키워야 하고.”
나는 울었다.
“왜 이렇게 됐지. 나 똑똑했잖아. 욕망도 있었잖아. 계획도 있었어.”
민지가 나를 안았다.
“미안해.”
“왜 너가 미안해.”
“도와주지 못해서.”
“괜찮아.”
나는 민지의 품에서 울었다.
18주.
엄마가 왔다.
“은서야.”
“엄마.”
엄마는 나를 안았다.
“힘들지?”
“응.”
“알아. 엄마도 알아.”
엄마는 냉장고를 열었다.
“뭐 이렇게 없어? 밥은 먹고 다녀?”
“먹어.”
“거짓말. 살 빠졌어.”
엄마는 장을 봐왔다.
요리를 해줬다.
미역국, 밥, 반찬.
“먹어.”
“고마워.”
우리는 함께 먹었다.
“은서야.”
“응.”
“넌 똑똑한 애야.”
“…응.”
“능력도 있어. 욕망도 있고.”
엄마가 말했다.
“이번에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어.”
“어떻게?”
“변호사 해. 계속. 아이 키우면서.”
“힘들 텐데.”
“힘들어. 당연히. 근데 넌 할 수 있어.”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네가 바라던 대로는 안 될 수도 있어. 근데 변호사는 할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나는 울었다.
“엄마. 나 성공하고 싶었어.”
“알아.”
“7년 준비했어.”
“알아.”
“근데 이제 안 될 것 같아.”
엄마가 나를 안았다.
“은서야. 인생이 항상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야.”
“알아.”
“근데 그래도 살아야 해. 다른 방식으로라도.”
나는 엄마 품에서 울었다.
다른 방식.
내가 꿈꾼 게 아닌.
하지만 살아야 하는.
20주.
배가 더 나왔다.
태동을 느꼈다.
작은 움직임.
살아있다.
내 안에.
나는 배를 만졌다.
“아가야.”
“엄마 다 잃었어. 미안해.”
태동이 또 왔다.
“근데 엄마 너 키울 거야. 열심히.”
나는 울었다.
“네가 바라던 대로는 안 될 것 같아. 근데 변호사는 할 거야. 너 키우면서.”
이게 내가 꿈꾼 삶은 아니지만.
이게 내 삶이 될 거야.
22주.
밖에 나갔다.
산책.
한강변.
사람들이 지나갔다.
커플들.
가족들.
행복해 보이는.
나는 혼자였다.
배를 만지며 걸었다.
미혼모.
능력 있었지만.
욕망도 있었지만.
꿈도 있었지만.
이렇게 됐다.
벤치에 앉았다.
강을 봤다.
내가 꿈꾼 삶.
성공.
남편.
아이.
하나도 제대로 안 됐다.
아니, 아이는 있다.
근데 이런 방식이 아니었는데.
24주.
병원에 갔다.
정기검진.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옆에 부부가 있었다.
아내의 배가 컸다.
남편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힘들어?”
“괜찮아.”
“조금만 참아. 곧 만날 수 있어.”
“응. 우리 아기.”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아기도 곧 만난다.
근데 혼자.
아빠 없이.
엄마도 망가진 채로.
26주.
새벽.
배가 아팠다.
심하게.
나는 일어났다.
화장실에 갔다.
피가 났다.
피.
“안 돼.”
나는 다리를 봤다.
피가 흘렀다.
“안 돼. 제발.”
119에 전화했다.
“임신 26주인데 피가 나요.”
“주소 말씀해주세요.”
구급차가 왔다.
나는 실려갔다.
혼자.
또 혼자.
응급실.
의사들이 뛰어다녔다.
“태아 심박 확인.”
“출혈 심해요.”
“보호자는?”
“없어요. 혼자예요.”
간호사가 내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힘내세요.”
나는 울었다.
“제 아기. 제발.”
“최선을 다할게요.”
나는 생각했다.
이것마저 잃으면.
나한테 남는 게 뭐지.
성공도 아니고.
남편도 없고.
아이마저 없으면.
나는 뭐지.
수술실.
불이 환했다.
의사가 말했다.
“최선을 다할게요.”
나는 눈을 감았다.
제발.
이것만은.
아이만은.
내가 다 잃어도.
이것만은.
눈을 떴다.
병실.
하얀 천장.
엄마가 옆에 있었다.
“은서야.”
“엄마.”
“깨어났구나.”
“아기는?”
엄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은서야.”
“아기는?”
“미안해.”
나는 알았다.
**아기가 없다는 것을.**
“안 돼.”
“은서야.”
“안 돼. 안 돼!”
나는 소리쳤다.
엄마가 나를 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나는 울었다.
커리어도 잃었다.
남편도 없다.
아이마저 잃었다.
나한테 남은 게 뭐지.
나는 뭐지.
똑똑하다던.
능력 있다던.
욕망도 있고 꿈도 있다던.
나는 뭐지.
이제.
일주일 후.
퇴원했다.
집으로 돌아왔다.
서초동 오피스텔.
빈 집.
나는 방에 들어갔다.
아기 옷을 샀었다.
작은 옷들.
승진할 준비도 했었다.
아이 키울 준비도 했었다.
둘 다 망가졌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울었다.
나는 똑똑했다.
능력도 욕망도 있었다.
다 가지고 싶었다.
근데 하나도 없다.
이제.
도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기 없어졌어요. 유산했어요.”
읽음.
한참 후.
“미안해. 몸 조리 잘 해.”
나는 핸드폰을 봤다.
미안해.
그게 다야?
우리 아이가 죽었는데.
내 꿈도 다 죽었는데.
그게 다야?
나는 전화했다.
도현이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받지 않았다.
역시.
혼자다.
나는 혼자다.
처음부터.
세 달이 지났다.
나는 조금씩 회복했다.
엄마가 매일 왔다.
“은서야. 일어나.”
“엄마. 나 힘들어.”
“알아. 근데 살아야지.”
“왜?”
“너 똑똑하잖아. 능력 있잖아.”
엄마가 말했다.
“아이는 잃었어. 원하던 것도 안 됐어. 근데 변호사는 할 수 있어.”
“하고 싶지 않아.”
“그래도 해야지. 그게 너니까.”
나는 엄마를 봤다.
그게 나니까.
능력 있고 욕망 있던.
꿈 있던.
근데 다 잃은.
회사에 전화했다.
“복귀할게요.”
“좋아요. 언제부터?”
“다음 주부터요.”
“알겠습니다. 파트너 심사는… 내년으로 미뤄졌어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내년.
또 미뤄질 거다.
어쩌면 영원히.
근데 괜찮다.
변호사는 할 수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도현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
“이제 연락하지 마세요. 저도 안 할게요. 돈도 보내지 마세요.”
읽음.
답장이 왔다.
“미안해. 정말.”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도현을 차단했다.
전화번호.
메시지.
모두.
끝났다.
도현과.
우리 아이와.
내가 꿈꾼 삶과.
모든 것이.
나는 거울을 봤다.
서른다섯.
변호사.
능력 있고 욕망 있던.
근데 다 잃은.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하는.
다른 방식으로.
내가 꿈꾼 게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