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균열의 문장ㅣ16장. 출산(은서)

새로운 무게

by 한서

1년이 지났다.


나는 서른여섯이 됐다.


여전히 변호사였다.


여전히 혼자였다.


그리고 다시 임신했다.


회사로 복귀한 건 유산 후 6개월 뒤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동정.


호기심.


안도.


“다행이네요. 혼자 키우는 거 힘들었을 텐데.”


누군가 말했다.


나는 웃었다.


다행.


그래.


다행이지.


일에 몰두했다.


밤샘 작업.


주말 출근.


클라이언트 미팅.


도망치고 싶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잃은 것들.


무너진 모든 것.


팀장이 말했다.


“은서 변호사,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쉬엄쉬엄 해요.”


“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생각나니까.


6개월 후.


회사 앞 술집.


혼자 앉아서 마셨다.


소주.


또.


케이스를 잃었다.


중요한 클라이언트.


팀장이 말했다.


“은서 변호사, 요즘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맞는 말이었으니까.


“여기 혼자세요?”


옆 테이블에서 남자가 말을 걸었다.


서른대 후반쯤.


정장 입은.


“네.”


“저도 혼자인데, 같이 마실래요?”


나는 그를 봤다.


왜 안 돼.


어차피 혼자인데.


“좋아요.”


그의 이름은 재훈이었다.


마흔.


무역회사 이사.


이혼했다.


“한 달 전에요.”


재훈이 말했다.


“힘들었어요. 이혼.”


이혼남.


가정 없다.


숨길 것도 없다.


자유롭다.


“아이는요?”


내가 물었다.


“없어요. 우리 둘 다 원하지 않았어요.”


아이도 없다.


완전히 자유롭다.


“저도… 힘든 일 있었어요.”


내가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유산했어요. 작년에.”


재훈이 내 손을 잡았다.


“힘드셨겠어요.”


따뜻했다.


나는 그 손을 꽉 잡았다.


채우고 싶었다.


이 빈자리를.


이번에는.


이번에는 다를 거야.


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일주일에 세 번 만났다.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재훈의 집에서.


섹스하고.


대화하고.


편했다.


외롭지 않았다.


2개월 후.


재훈이 말했다.


“은서씨, 좋아해요.”


“저도요.”


나는 말했다.


사랑인지 아닌지 몰랐다.


하지만 필요했다.


“사귀는 거죠?”


재훈이 물었다.


“네.”


빨랐다.


너무.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운명처럼 끌렸다.


3개월 후.


생리가 늦었다.


나는 알았다.


또.


약국에 갔다.


임신테스트기를 샀다.


손이 떨렸다.


제발.


제발 아니길.


하지만 알았다.


맞다는 것을.


화장실.


테스트기를 꺼냈다.


두 줄.


나는 주저앉았다.


또.


또 임신했다.


울었다.


“왜. 왜 또.”


왜 나는.


왜 자꾸 이렇게 되는 거지.


재훈에게 전화했다.*


떨리는 손으로.


“재훈씨.”


“응. 왜?”


“만나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이에요?”


“…임신했어요.”


전화기 너머로 침묵.


긴 침묵.


“확실해요?”


“네.”


“…만나요. 지금.”


카페.


재훈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확실해요?”


“테스트기에 두 줄이요.”


재훈은 커피를 마셨다.


한참.


“은서씨.”


재훈이 말했다.


“결혼해요.”


나는 멈췄다.


“뭐라고요?”


“결혼하자고요.”


재훈이 내 손을 잡았다.


“책임질게요.”


책임.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는다.


“진심이에요?”


“네. 사랑해요, 은서씨.”


사랑.


나는 울었다.


“저도요.”


거짓말이었다.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필요한 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잘 될 거야.


우리는 결혼했다.


2개월 후.


임신 5개월 때.


작은 결혼식.


가족들만.


엄마가 말했다.


“은서야. 괜찮은 거야? 만난 지 얼마 안 됐잖아.”


“괜찮아. 이번엔 달라.”


“뭐가?”


“재훈씨는 가정 없잖아. 숨길 것도 없고.”


엄마는 나를 봤다.


걱정스러운 눈빛.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혼 생활.


처음엔 괜찮았다.


재훈은 다정했다.


병원에 같이 갔다.


손을 잡아줬다.


하지만.


조금씩.


균열이 보였다.


임신 6개월.


재훈이 늦게 들어왔다.


“어디 갔었어요?”


“친구 만났어.”


“전화 한 통 없었잖아요.”


“미안. 깜빡했어.”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재훈은 늦게 들어왔다.


핑계가 많았다.


“회식.”


“거래처 미팅.”


“동창 모임.”


임신 7개월.


재훈 핸드폰이 울렸다.


새벽.


재훈은 자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봤다.


“지은”


여자 이름.


문자.


“자기야. 오늘 왜 안 와? 기다렸는데.”


가슴이 무너졌다.


재훈을 깨웠다.


“재훈씨.”


“응? 뭐야.”


“이거 뭐예요?”


핸드폰을 보여줬다.


재훈의 얼굴이 굳었다.


“…그냥 친구야.”


“거짓말.”


“진짜 친구라니까.”


“‘자기야’가 친구예요?”


“은서씨. 지금 임신 중인데 이러지 마.”


재훈이 짜증 냈다.


“스트레스 받으면 애한테 안 좋아.”


“뭐라고요?”


“그냥 자. 피곤해.”


재훈은 돌아누웠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바람피우고 있다.


재훈이.


임신 중인데.


다음 날.


재훈을 붙잡고 물었다.


“지은이가 누구예요?”


“그냥 친구라니까.”


“거짓말하지 마요!”


“은서씨. 시끄러워.”


재훈이 소리쳤다.


“아침부터 뭐야! 임신했다고 왜 이렇게 예민해!”


“예민한 게 아니에요. 바람피우잖아요!”


“바람? 웃기지 마.”


재훈이 말했다.


“친구 만나는 것도 바람이야?”


“자기야라고 불렀잖아요!”


“별명이야. 별명!”


재훈은 현관으로 갔다.


“회사 가야 돼. 이따 얘기해.”


문이 닫혔다.


나는 주저앉았다.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


임신 8개월.


재훈과 또 싸웠다.


늦게 들어왔다.


술 냄새.


“어디 갔었어요?”


“회식.”


“거짓말. 지은이 만났죠?”


“은서씨. 그만해.”


“왜요? 바람피우면서 왜 그만하래요?”


“바람 안 피운다니까!”


재훈이 소리쳤다.


“씨발! 진짜 답답해!”


재훈이 벽을 쳤다.


쾅.


나는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재훈의 눈빛.


화.


분노.


폭력적인.


“미안.”


재훈이 말했다.


“너무 화나서. 미안.”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게 시작이라는 것을.


임신 9개월.


재훈이 또 늦게 들어왔다.


나는 기다렸다.


거실에서.


“어디 갔었어요?”


“친구 만났어.”


“지은이요?”


“은서씨. 그만하라니까.”


“대답해요. 지은이 맞죠?”


재훈이 나를 봤다.


“맞아. 지은이 만났어. 그래서?”


심장이 멎었다.


인정했다.


당당하게.


“왜… 왜 그래요?”


“답답해서.”


재훈이 말했다.


“솔직히 결혼 너무 빨랐어. 임신해서 어쩔 수 없이 한 거잖아.”


가슴이 무너졌다.


“그럼 왜 결혼하겠다고 했어요?”


“책임져야지. 근데 그렇다고 내가 행복한 건 아니잖아.”


재훈이 말했다.


“은서씨도 알잖아. 우리 사랑해서 결혼한 거 아니잖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뭐? 성인인데 친구 만나는 것도 안 돼?”


“친구가 아니잖아요!”


“닥쳐!”


재훈이 소리쳤다.


그리고.


때렸다.


내 뺨을.


탁.


나는 멈췄다.


뺨을 만졌다.


뜨거웠다.


재훈은 자기 손을 봤다.


“미안. 나도 모르게…”


“나가요.”


내가 말했다.


“은서씨.”


“나가라고요!”


재훈은 나갔다.


문이 닫혔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울었다.


맞았다.


재훈한테.


임신 중인데.


맞았다.


출산.


진통이 왔다.


새벽.


재훈을 깨웠다.


“재훈씨. 진통 와요.”


재훈은 일어났다.


짜증 섞인 얼굴로.


“지금?”


“네. 병원 가야 해요.”


“택시 타.”


“뭐라고요?”


“나 내일 중요한 미팅 있어. 못 가.”


재훈은 다시 누웠다.


나는 혼자 택시를 탔다.


혼자.


또.


병원.


분만실.


진통.


심했다.


간호사가 물었다.


“보호자는요?”


“없어요.”


“…네.”


간호사의 눈빛.


안됐다는.


나는 혼자였다.


또.


“힘내세요!”


간호사가 말했다.


나는 힘을 줬다.


아팠다.


너무.


“나왔어요!”


아기가 울었다.


응애.


응애.


“딸이에요.”


간호사가 아기를 내 품에 안겨줬다.


작은.


빨간.


울고 있는.


내 아이.


나는 울었다.


“미안해.”


내가 말했다.


“엄마가 너를 잘못된 이유로 낳았어.”


재훈은 오지 않았다.


출산 당일에도.


다음 날에도.


사흘째 되는 날.


왔다.


“미안. 바빠서.”


꽃다발을 들고.


아기를 봤다.


“딸이구나.”


웃지 않았다.


관심 없다.


아이에게.


나에게.


나는 알았다.


이 결혼은 끝났다.


시작도 안 했지만.


병실.


혼자 누워 있었다.


재훈은 회사에 갔다.


아기가 옆에서 잤다.


나는 천장을 봤다.


힘들었다.


너무.


재훈과의 모든 과정이.


거짓말.


바람.


폭력.


출산.


다.


너무 힘들어서.


다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냥.


버텨냈다.


하루하루.


퇴원.


집으로 돌아왔다.


재훈의 집.


재훈은 없었다.


문자가 왔다.


“미팅 있어. 늦을 거야.”


거짓말.


지은이 만나는 거겠지.


나는 아기를 방에 뉘었다.


작은 침대에.


아기를 봤다.


미안해.


밤.


아기가 울었다.


나는 일어났다.


재훈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기를 안았다.


젖을 물렸다.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


아기는 먹었다.


나는 창밖을 봤다.


어두운 밤.


혼자.


또.


모든 게 끝났다.


이제.


문득.


도현이 생각났다.


처음으로.


재훈과 함께였던 1년 동안.


너무 힘들어서.


생각할 여유도 없었는데.


이제.


모든 게 끝나가니까.


생각났다.


도현.


도현이 원망스럽다.


도현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아니다.


나는 아기를 봤다.


진짜 문제는.


나였다.


도현이 아니라.


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덮으려 했다.


빈자리를 채우려 했다.


급하게.


운명처럼 느껴졌지만.


운명이 아니었다.


그냥 반복이었다.


패턴.


그리고 나는.


배우지 못했다.


나는 울었다.


조용히.


아기가 깰까봐.


미안해.


내가 너를 이 안에 낳았어.


또 다른 비극.


반복되는 패턴.


끝나지 않는.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어.


문제는.


나였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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