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균열의 문장ㅣ14장. 선택(도현)

무너지는 완벽

by 한서

토요일 오후.


나는 서초동 오피스텔로 갔다.


은서를 만나러.


문을 열었다.


“은서야.”


“응. 여기.”


은서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 일어섰다.


하지만 표정이 이상했다.


창백했다.


나는 도현이다.


예순둘.


제약회사 회장.


은서와 만난 지 6개월.


행복했다.


그때까지는.


“무슨 일 있어?”


내가 물었다.


은서는 나를 봤다.


“앉아요.”


“왜? 뭔데?”


“앉아요. 먼저.”


나는 앉았다.


은서도 앉았다.


내 맞은편에.


손을 꽉 쥐고.


“은서야. 뭔데? 걱정되게.”


“도현 씨.”


은서가 말했다.


“나…”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 임신했어요.”


시간이 멈췄다.


나는 은서를 봤다.


“뭐라고?”


“임신이요.”


은서가 다시 말했다.


“5주.”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임신.


은서가.


내 아이를.


“확실해?”


“병원 갔어요. 확실해요.”


침묵.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럴 수가.


나는 생각했다.


지현.


입양한 딸.


5살 때 왔다.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하지만,


수연이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입양했다.


하지만 늘 아쉬웠다.


내 피를 이은 아이.


내 DNA를 가진.


가끔 생각했다.


지현을 보면서도.


닮았을까.


내 어릴 적 모습과.


그리고 지금.


은서 뱃속에.


내 아이가 있다.


처음으로.


예순둘에.


“언제 알았어?”


내가 물었다.


“며칠 전이요.”


“왜 진작 말 안 했어?”


“무서웠어요.”


은서가 말했다.


“도현 씨 반응이.”


나는 은서를 봤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은서야.”


“네.”


“이거…”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고 말하지.


기쁘다고?


두렵다고?


“어떡할 거야?”


내가 물었다.


은서는 나를 똑바로 봤다.


“저는요.”


그녀가 말했다.


“낳고 싶어요.”


나는 멈췄다.


“뭐?”


“이 아이. 낳고 싶어요.”


“은서야.”


“도현 씨 아이잖아요. 우리 아이.”


“은서야. 진정해.”


“진정했어요.”


은서가 말했다.


“며칠 동안 생각했어요. 계속. 그리고 결정했어요. 낳고 싶다고.”


나는 일어났다.


창가로 갔다.


밖을 봤다.


서울.


나는 생각했다.


수연.


집에 가면 수연이 있다.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오면 웃으며 맞이할 것이다.


“골프 어땠어요?”


그렇게 물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고,


TV를 보고,


손을 잡고 침대에 누울 것이다.


32년.


그렇게 살아왔다.


편안했다.


수연은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나도 수연을 건드리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했다.


그게 우리 방식이었다.


굳이 깨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은서가 필요했다.


외로웠으니까.


수연과는 섹스하지 않았다.


대화도 형식적이었다.


감정적 교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했다.


부담 없었으니까.


그래서 은서를 만났다.


채우고 싶었으니까.


그 빈자리를.


하지만 수연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굳이 왜.


그리고 이 아이.


내 피를 이은.


늘 바라왔던.


하지만 지금.


두렵다.


이 아이가 태어나면,


모든 게 달라진다.


수연에게 들킬 수도 있다.


지현이 알게 될 수도 있다.


회사 사람들이.


친구들이.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나에게 숨겨진 아이가 있다는 것을.


불륜으로 낳은.


“도현 씨.”


은서의 목소리.


나는 돌아섰다.


“은서야.”


“뭐 생각해요?”


“…은서야. 아이는 안 돼.”


“왜요?”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는 지금 내 삶이 편해.”


“뭐라고요?”


“수연이랑. 집. 회사. 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굳이 깨고 싶지 않아.”


은서는 나를 봤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있잖아. 지금도 괜찮아. 너랑 만나는 것도, 수연이랑 사는 것도.”


“둘 다요?”


“응. 둘 다.”


나는 말했다.


“수연은 편해. 32년 같이 살았어. 모든 게 익숙해. 루틴도, 대화도. 아무 문제없어.”


“사랑은요?”


“사랑?”


나는 웃었다.


“사랑은 네가 있잖아.”


은서는 입을 벌렸다.


말을 잃은 듯.


“도현 씨. 지금 농담해요?”


“아니. 진심이야.”


“진심으로 그런 소리를 해요?”


“은서야. 있잖아.”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는 수연 떠날 생각 없어. 근데 너도 필요해. 둘 다 필요해. 그게 안 돼?”


“안 되죠!”


은서가 손을 빼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왜 안 돼?”


“저는 도현 씨 애인이에요. 숨겨진. 비밀. 그것도 모자라서 아이까지 숨기라고요?”


“은서야.”


“수연 씨는 편하니까 두고, 저는 욕구 해소용이니까 만나고, 아이는 부담되니까 없애고?”


“그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사실이잖아요!”


은서가 소리쳤다.


나는 답답했다.


왜 이해 못 하지.


“은서야. 나는 솔직하게 말하는 거야.”


“솔직하게요?”


“응. 나는 수연이랑 헤어질 수 없어. 아니, 헤어지고 싶지 않아.”


나는 말했다.


“32년이야. 내 삶에 너무 깊이 들어와 있어. 수연이. 우리 집. 우리 루틴. 다.”


“그럼 저는요?”


“너는 따로야.”


“따로요?”


“응. 너는 내가 필요해서 만나는 거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수연은… 있어야 하는 거고.”


은서는 나를 봤다.


눈물이 흘렀다.


“최악이네요.”


“은서야.”


“정말 최악이에요. 도현 씨.”


“나도 알아.”


내가 말했다.


“나도 알아. 내가 이기적인 거. 비겁한 거.”


“알면서 왜 그래요?”


“왜긴. 편하니까.”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수연이랑 헤어지면 복잡해져. 재산 분할, 주변 시선, 회사 이미지. 다 귀찮아.”


“그래서 저한테 아이 지우라고요?”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도현 씨.”


은서가 물었다.


“지현 씨 입양하셨잖아요.”


나는 멈췄다.


“그래서?”


“친자식 없잖아요. 이 아이가 도현 씨 친자식인데. 그래도 지우라고요?”


침묵이 흘렀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맞는 말이었으니까.


“은서야.”


“대답해요.”


나는 입을 열었다.


“…그래.”


“뭐라고요?”


“미안하지만. 그래.”


나는 말했다.


“지금은 안 돼.”


“왜요?”


“무서워.”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 아이가. 태어나면 모든 게 바뀔 것 같아서.”


“그래서 포기해요?”


은서가 물었다.


“평생 바라던 걸?”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기해. 편한 게 더 중요하니까.”


은서는 웃었다.


쓴웃음.


“진짜 비겁하네요.”


“알아.”


“겁쟁이예요.”


“맞아.”


나는 인정했다.


은서는 일어섰다.


“알겠어요.”


“뭐가?”


“도현 씨가 어떤 사람인지.”


은서가 말했다.


“처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은서야.”


“가세요.”


“우리 이야기 더 해야 돼.”


“할 말 없어요.”


은서가 문을 열었다.


“저는 낳을 거예요. 이 아이.”


“은서야. 제발.”


“도현 씨 없이요.”


은서가 말했다.


“도현 씨는 편한 삶 사세요. 수연 씨랑.”


“은서야. 돈은 줄게.”


“필요 없어요.”


“매달 500 아니라 더 줄게. 1000. 아니 더.”


“가세요.”


은서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었다.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


“은서야.”


내가 말했다.


“나 너 사랑해.”


“알아요.”


“진심이야.”


“알아요. 근데 그게 다예요.”


은서가 말했다.


“도현 씨 사랑은 편한 범위 안에서만이에요. 불편해지면 끝이고요.”


“은서야. 그건…”


“맞잖아요.”


은서가 말했다.


“수연 씨 떠나는 건 불편하니까 안 하고, 저는 편하니까 만나고, 아이는 불편하니까 없애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맞는 말이었으니까.


“가세요.”


은서가 다시 말했다.


나는 그녀를 봤다.


마지막으로.


“은서야. 진짜 혼자 낳을 거야?”


“네.”


“후회 안 해?”


“모르겠어요. 근데 지우는 것보단 낫겠죠.”


“은서야.”


“가세요. 제발.”


나는 나갔다.


문이 닫혔다.


복도에 섰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차에 탔다.


운전석에 앉아서.


핸들을 잡았다.


은서가 임신했다.


내 아이.


평생 바라왔지만.


포기했다.


핸드폰을 봤다.


수연에게서 문자.


“몇 시에 와요? 저녁 준비할게요.”


나는 핸드폰을 봤다.


수연.


32년.


편안한 삶.


굳이 깰 이유가 없는.


답장했다.


“7시쯤 갈게요.”


“네. 기다릴게요.”


나는 시동을 걸었다.


집으로 갔다.


수연에게.


내 편안한 삶으로.


운전하면서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다.


겁쟁이다.


하지만 바꿀 수 없다.


이게 나니까.


집에 도착했다.


수연이 문을 열었다.


“왔어요?”


“응.”


“골프 어땠어요?”


“그냥 그랬어.”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수연이 저녁을 준비했다.


“씻고 와요. 곧 차릴게요.”


“응.”


나는 샤워했다.


거울을 봤다.


예순둘.


회색 머리.


깊은 주름.


그리고 어딘가에서.


내 아이가 자라고 있다.


은서 뱃속에.


나는 거울에서 눈을 뗐다.


저녁 식사.


수연과 마주 앉았다.


“맛있어요.”


내가 말했다.


“다행이네요.”


수연이 웃었다.


“요즘 피곤해 보여요. 괜찮아요?”


“응. 괜찮아.”


“너무 무리하지 마요.”


“응.”


우리는 조용히 먹었다.


평화로웠다.


편안했다.


32년 동안 만들어온 루틴.


나는 이걸 깨고 싶지 않았다.


밤.


수연과 침대에 누웠다.


수연은 내 손을 잡았다.


커플 잠옷을 입고.


“잘 자요.”


“잘 자.”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수연의 규칙적인 숨소리.


나는 천장을 봤다.


은서.


임신.


아이.


잠들 수 없었다.


하지만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여기 있을 것이다.


수연 옆에.


왜냐하면 이게 편하니까.


이게 내가 선택한 삶이니까.


은서와 아이는.


미안하지만.


불편하니까.


무서우니까.


작가의 이전글[장편] 균열의 문장ㅣ13장. 임신 (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