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불쌍해

by 한서

“불쌍해.”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옷을 한 겹씩 벗기는 것 같았다. 상의, 하의, 속옷까지. 알몸으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피부에 닿았다. 따갑고 차가웠다.


남편과의 불화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그 시선들이었다. 걱정 어린 눈빛, 조심스러운 말투, “괜찮아?“라는 물음표. 그들은 선의였겠지만, 나는 매번 작아졌다.


자존심이 상했다.


부끄러웠다.


나는 누군가에게 ‘불쌍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밤마다 악몽을 꾸었다. 사람들 앞에 서 있는데 옷이 없는 꿈, 말을 하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꿈. 깨어나면 등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럴 때마다 TV를 켰다.


이혼숙려캠프, 결혼 지옥. 화면 속 사람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저것보단 낫지.” 그게 위로였다. 기준점이 필요했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들이 있어야 내가 조금 덜 불쌍해질 것 같았다.


주변에서 이혼 소식이 들려왔다.


“어머, 걔도?”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네.”

“행복한 부부가 어디 있겠어.”


그 말들이 위로가 됐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다들 그렇게 사는구나.


그런데 어느 날 깨달았다.


나는 누군가의 기준점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저것보단 낫지.”

“우리도 힘들지만 저 사람 생각하면…”


나는 타인의 불행 측정기였다. 누군가의 위로 도구였다.


자존심이 무너졌다.


하지만 이상했다. 바닥까지 내려간 자존심 아래에서 뭔가 단단한 게 만져졌다.


분노였을까, 오기였을까.


아니, 그보다는.


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나를 상처 준 건 사람이었다. 거짓말, 폭력, “불쌍해”라는 시선. 전부 사람이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나를 일으킨 것도 사람이었다.


친구의 “네 편이야”라는 문자.

엄마의 “잘했어”라는 문자.

모르는 사람의 “응원해요”라는 댓글.


사람이 나를 무너뜨렸지만, 사람이 나를 다시 세웠다.


그때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더 잘해야지.’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나도 누군가에게 소망이 되어야지.’

‘귀감이 되어야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그게 나를 움직이게 했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샤워를 했다.

밥을 먹었다.

옷을 입었다.


작은 것들이었지만, 해냈다.


JTBC ‘이혼숙려캠프’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후 실제로 이혼율이 줄었다고 한다. 화면 속 부부들의 불행을 보며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봤을 것이다. “우리도 저렇게 되기 전에 노력해보자”고.


나도 누군가의 화면이었다.


누군가는 나를 보며 “저것보단 낫지”라고 안도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나를 보며 “나도 견뎌야지”라고 다짐했을 것이다.


그게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괜찮았다.


나는 누군가의 기준점이 되었고, 그 기준점이 조금씩 위로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불쌍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제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 괜찮아. 나 이제 괜찮아.”


목소리가 떨릴 때도 있다.

눈물이 날 것 같을 때도 있다.


하지만 말은 한다.


“괜찮아.”


그 말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 괜찮아질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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