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가기

<파과>, 구병모

by 박카스맛젤리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위저드 베이커리>, <아가미>의 작가 구병모의 소설인 <파과>를 이북으로 읽었다. 차갑고 살벌한 문체와 흔치 않은 단어 선택이 아주 인상적이다. 구병모는 필명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작가님 여자인 줄도 몰랐음… 최근에 나온 <상아의 문으로>도 궁금해졌다.



노년의 여성인 조각은 예전과 같지 않은 자신의 신체를 느끼며 오늘도 ‘방역’을 한다. 썩어버린 갈색 복숭아를 손에 쥐면 ‘그것은 그녀의 손 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리’고 만다. 노인을 향한 노골적인 무시의 시선을 그녀는 그저 흘겨볼 뿐이다.


꼭 개라서가 아니다. 사람한테라고 다를 바 없지. 늙은 이는 온전한 정신으로 여생을 살 수 없을 거라는…… 늙은 이는 질병에 잘 옮고 또 잘 옮기고 다닌다는…… 누구도 그의 무게를 대신 감당해주디 않는다는.


조각의 주변에는 그런 조각과 동종업에 종사하는 투우가 있다. 투우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함께 그 당시 마주쳤던 조각의 젊은 모습을 기억한다. 아름답고 깨끗하던 손톱 같던 시절. ‘그것은 기억과 호환되지 않는 현재였고 상상에 호응하지 않는 실재였으며, 영원히 괄호나 부재로 남겨두어야만 하는 감촉이었다.’


‘이제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내가 당신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이제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조각이 손톱이던 시절, 그러니까 손톱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그녀의 곁엔 류가 있다. 그 시절의 그녀는 어린 투우의 약을 곱게 빻아 매시간 챙긴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달렸으며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멈출 수도 없었다. 그곳에 닿은 이후로도 조각은 류와의 기억에 기대어 달린다.


류한테만은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는데.
인연이라곤 주워진 것뿐이라 해도.
어디로든 멀리 도망가 다시 류를 만날 수 없게 되는 편이, 싸늘한 눈으로 오해를 받기보다 나을까.


조각은 우연히 강 박사를 알게 되면서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그러운 시절’을 기억한다. 잊고 싶었으나 작고 단단하게 붙어있던 기억에 조각은 흔들린다. 아름답던 그때에 아직 미련이란 것이 남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욕심이 생긴다. 그 욕심 때문에 조각은 투우와 마주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상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손톱을 가꾸러 네일숍에 간다.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지기에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조각의 손톱 같은 것이 그렇고 나의 이 지금이 그렇다. 내 현재, 과거, 존재마저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아쉬움에 놓지 못하고 지나가는 시간을 멈춰보고자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미련으로 붙잡아 둘 수도 없다는 것을 안다.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상실을 받아들이고 순간을 최선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