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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끄로 Jan 16. 2024

우리 오늘은 뭐 먹어?

첫 번째 시베리아 횡단열차

솜에게

 3시간 뒤면 이번 열차에서 내리네? 우리가 횡단열차를 탄지 벌써 3일째가 되었어. 아주 차분하게 떡진 내 머리를 보니까 시간이 흐르긴 한 모양이야. 오늘 아침부터는 내 정수리 냄새에 화가 나더라고. 빨리 이르쿠츠크에 도착해서 머리 감고 싶어. 그래도 몸은 생각보다 찝찝하지 않아. 열차 안이 건조해서 그런가 봐. 


 3일 동안 우리의 하루는 단순했어.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때 일어나 이불을 정리해. 그리고 창밖을 바라봐. 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밥을 먹고, 다시 졸리면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풍경을 보고,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눠. 그러다 열차가 정차하면 바깥바람을 쐬러 나갔지. 10분 이내로 정차하는 역은 멀리 갈 수 없으니까 플랫폼 위에서만 바깥공기를 맡았잖아. 나는 이때 담배냄새를 맡는 건지 바깥공기를 맡는 건지 구분이 잘 안 갔어. 이 정도면 내가 담배를 피우는 게 더 건강할 것 같더라. 그러다 오랜 시간 정차하는 역에 열차가 멈춰 서면 우리는 산책 나가는 강아지처럼 신나서 뛰어다녔잖아. 20분 이상 정차하는 곳에서는 역사 밖으로 나가고, 역사 화장실도 구경했지. 혹시나 기차를 놓칠까 걱정하면서도 여기저기 둘러보는 일탈 같은 그 시간이 나는 정말 즐거웠어.



 너와 나는 정말 물먹는 하마야. 하루에 두 번 이상은 새로운 매점에서 생수를 충전하니까. 열차 내에 있는 뜨거운 물을 받아서 ‘차’를 자주 마셨는데도 목이 말랐나 봐. 말을 많이 해서 그런가? 아님 열차 내부가 건조해서 그런 걸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가 산 생수 브랜드가 겹치지 않는 것 같아. 러시아는 땅이 넓어서 지역마다 선호하는 생수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 러시아 여행이 끝날 때까지 최대한 다양한 종류의 생수를 먹어봐야겠어. 


 횡단열차에서 우리의 주식은 컵라면과 햇반 그리고 빵이었어. 거의 탄수화물이네? (열차 내려서는 단백질도 잘 챙겨 먹자.) 우리의 첫끼는 도시락 컵라면 2개였고, 다음은 햇반 1개와 볶음고추장 그리고 진라면 1컵이었어. 아 맞다. 후식으로 정차역에서 어떤 할머니에게서 산 빵도 먹었지. 정말 할머니가 집에서 만든 것 같은 맛이었어. 기본에 충실한 맛이었지. 



 빵도 맛있었지만 우린 역시 한국인인가 봐. 밥이 최고야. 횡단열차 타기 전에 우리가 가장 걱정했던 게 햇반이었잖아. 뜨거운 식수는 콸콸 나와서 언제든지 컵라면은 먹을 수 있지만, 전자레인지를 사용하려면 기차의 차장님께 부탁해야 하니까. 햇반이 거부당할까 봐 걱정했지. 다행히 우리 칸의 차장님은 ‘곰돌이 푸’를 닮은 친절한 아저씨였어. ‘푸 차장님’의 전자레인지 덕에 따뜻한 햇반을 먹을 수 있어 행복하더라. 우리가 러시아어를 거의 몰라서 차장님과 말을 제대로 해보진 않았지만, ‘푸 아저씨’의 표정을 보니 우리를 귀여워하는 게 느껴졌어. 착각인 걸까? 아무튼 우리 열차 너무 잘 탄 것 같아. 그리고 네가 대표로 햇반 데워달라고 부탁해 줘서 고마워. 나도 소심해지는 순간이 자주 찾아오거든. 역시 우린 최고의 여행메이트야! 


 어제 아침부터 너의 굿모닝 인사는 ‘잘 잤어?’에서 ‘우리 오늘은 뭐 먹어?’로 바뀌었어. 나도 일어나자마자 ‘오늘 뭐 먹지?’ 생각하고 있었거든. 우리는 그래서 남은 열차 일정동안 먹을 음식들을 생각하면서 식단표를 짰지. 하루종일 정제 탄수화물만 먹으니까 살아있는 채소도 먹어야겠다 싶어서 토마토와 오이도 추가해서 좀 더 건강한 식단을 짰어. 정차하는 역 중간 매점에서 오이, 바나나, 토마토를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그렇게 우리는 어제 점심으로 불닭볶음면에 김, 그리고 오이, 바나나, 토마토를 먹었지. 아주 불량하고 건강한 식단이야. 저녁에는 네가 가져온 비장의 무기인 고추참치를 진라면이랑 같이 먹으니까 정말 행복하더라. 한국에서 먹을 때는 그저 그런 컵라면과 즉석밥들이 해외에서 먹으면 왜 이렇게 맛있을까. 이렇게 소박한 것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니.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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