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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끄로 Jan 17. 2024

이방인

첫 번째 시베리아 횡단열차

초초에게

 낮잠 자는 시간이 아쉬워서 잠도 자지 않았어. 네가 2층 침대에서 자는 동안 책을 읽었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조금 이상하더라. 이곳에서 이방인인 내가 그런 제목의 책을 읽고 있는 게 그냥 이상했어. 다들 나와 전혀 다른 생김새를 가지고 있고, 전혀 다른 언어를 쓰고. 갑자기 생경한 기분이 들었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없으니 이곳의 소음이 시끄러운 고독처럼 느껴졌어.

 지난 유럽 여행 때, 두오모 성당에서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을까 고민했었어. 근데 책이 무거워서 안 가져갔어. 고작 책 한 권이 얼마나 무겁다고. 그게 다녀온 지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아쉽더라. 그 때 바티칸 성당 첨탑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봤어.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면서 책을 읽는데, 그게 그렇게 부럽더라. 나는 부지런히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여행자라기보다 한 자리에 한참 멈춰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거든. 바람이 살랑 부는 어느 한 곳에서, 혹은 이동하는 중간에 책을 읽으면 좋겠다 싶었어. 기왕이면 내가 가는 곳과 관련된 책을 읽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러시아 문학은 아직까지 나에게 거리감이 느껴졌고, 장편을 가지고 오기에는 캐리어 공간이 부족했어. 그래서 가져온 게 <이방인>이야.


 건너편 2인 침대 아줌마가 날 보고 활짝 웃었어. 남편이랑 부부 싸움을 하고 머쓱했나 봐. 나도 따라서 그냥 활짝 웃었어. 근데 그게 괜히 따스한 느낌이 들었어. 그냥 별거 아닌 웃음이, 그런 따뜻함이 그리웠나 봐.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친절, 그냥 보내는 미소 같은 것들 있잖아. 어차피 나는 그들이 뭐라고 얘기하는지 하나도 알 수 없는데. 너무나 다른 이방인인 내가 그들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어. 이상하게도. 근데 그 이상한 소속감? 집 같은 느낌이 좋더라. 혼자 산 시간이 좀 길어서 인 것 같기도, 그냥 사람한테 좀 치여서 그럴지도.


 이렇게 열차에서의 삶이 많이 익숙해졌어. 생각했던 것보다 열차가 많이 흔들리지만. 휴대폰도 안 터져서 지금 오랫동안 정차해 있는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겠어. 근데 이 모든 게 괜찮아. 허리가 아파도 여기서의 한량 생활이 정말 좋아. 졸리면 자고, 해가 뜨면 눈을 뜨고, 씻을 여력이 되지 않아 떡 진 머리와 기름진 얼굴로 며칠을 보내고 있잖아. 심지어 시간을 확인하는 것도 오로지 휴대폰이 터지는 정차역뿐. 그냥 우리의 배꼽시계, 해시계만 믿고 살아가고 있어. 언제 이런 경험을 하겠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그런 본능에 충실한 삶! 너무 좋아. 초초가 아니었으면 하지 않았을 값진 경험이야. 함께 오자고 말해줘서 고마워.


 구식 열차의 꼬리칸이라 꽤 걱정했는데, 걱정한 것에 비해서 괜찮아. 씻지 않는 것도 익숙해졌고, 좁은 열차도 익숙해졌어. 내일이면 열차에서 내린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이 열차에 있는 사람들이랑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그냥 정이 들었어. 익숙해졌고. 우리 칸 차장님도 따뜻하게 우리 부탁 들어주고, 살펴줬잖아. 그런 모든 게 좋았어. 다시 탈 열차도 별 일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어. 정들만한 사람들도 만났으면 하고.

 내일이면 이 열차에서 내려. 내가 러시아에 와서 꼭 하고 싶은 것이 뭐였냐고 묻는다면, 바이칼 호수에 가는 거였어. 사실 꽁꽁 언 바이칼 호수 위를 걸어보고 싶었는데 그건 지금 불가능하잖아. 나의 버킷리스트에 적어두고 미래의 언젠가 겨울에 와보려 해. 가급적 함께 해 줘. 강요에 가까운 부탁이야. 바이칼 호수가 얼마나 대단한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알기 전까지는 몰랐어. 바다 같이 큰 호수가 있다니, 너무 궁금했어. 아까 바이칼 호수를 지날 때 열차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창가로 몰려든 걸 보고 내가 그 찰박이는 호수를 만질 수 있다는 게 벅찼어.


 흔들리지 않는 육지를 튼튼한 두 발로 잘 디뎌보자. 이제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푸른 바이칼 호수도 느낄 수 있어. 3일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흔들리는 열차에서 고생 많았어. 앞으로의 우리 여정도 고생스럽겠지만, 지금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함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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