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쿠츠크
어젯밤 택시에서 본 이르쿠츠크의 야경은 기대 이상이었어. 도시가 생각보다 크더라. 나는 블라디보스토크나 야쿠츠크 정도로 생각했거든. 찾아보니까 이르쿠츠크는 러시아의 극동, 극서 그리고 중앙아시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래. 그래서 도시가 이렇게 큰가 봐.
열차에서부터 신선한 채소를 먹자고 노래를 부른 우리는 서브웨이로 향했지. 그런데 관광지가 아니라서 영어 메뉴판이 없었어. 직원분도 우릴 보고 당황한 눈치였지만, 러시아어로 무슨 빵과 치즈를 고를지, 야채는 다 넣을지 물어봤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정하게. 그리고 우린 손짓과 눈빛으로 야무지게 30cm 샌드위치를 주문했지. 한국에서처럼 빵 속을 파달라는 이야기는 못했지만 나는 이만하면 만족해. 영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건 뿌듯한 경험인 것 같아. 3년 전, 야쿠츠크에 있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처음 물을 샀을 때도 친구랑 엄청 뿌듯해했거든. 오늘 서브웨이 주문도 그래. 서브웨이 안으로 들어갈 때부터 먹는 순간까지 네가 촬영한 영상들 다시 봐도 뿌듯하다. 다음엔 러시아어로 주문을 해보고 싶어.
신선한 샌드위치로 배를 채운 후, 우리의 추억을 채우기 위해 바이칼 호수로 향했어. 버스터미널로 가려면 시내버스를 타야 했는데, 정말 오래된 버스더라. 부모님이 어린 시절 타셨을 것 같은 버스였어. 돈을 내거나 교통카드를 찍는 기계는 따로 없고, 일단 타면 직원이 와서 돈을 받고 영수증 같은 티켓을 주는 시스템이었어. 출퇴근 시간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어떻게 관리할까 궁금하긴 하더라. 아니면 우리가 카드 단말기를 못 본 걸까?
버스터미널에 내려서 바이칼 호수 행 티켓을 사고, 시간에 맞춰 버스에 탔어. 버스보다는 벤이라고 부르는 게 맞으려나? 버스는 바이칼호수를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마을인 리스트비얀카로 향했어. 너는 알혼섬까지 가서 바이칼 호수를 보고 싶어 했는데, 미안 이르쿠츠크 일정을 하루밖에 안 넣어 버렸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꽝꽝 언 바이칼 호수를 보러 가자!
오랜만에 이렇게 낡은 벤을 타니 우리의 라오스 여행이 떠올라. 신형 도요타 벤인 줄 알고 구매한 티켓이 완전히 낡은 버스였잖아. 자리도 없어서 맨뒤에 앉았고. 어찌나 덜컹거리고 모래먼지가 풀풀 날리는지. 에어컨 바람은 느껴지지도 않았어. 나의 첫 해외여행을 고생스럽게 시작해서 그런가 편안한 여행은 재미없어. 그래서 우리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러 온 거 아니겠어! 고생을 하면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아.
이게 호수라니. 믿기지가 않아. 우리 둘 다 말없이 셔터만 누른 것 같아. 저 멀리 보이는 산들이 없었다면 바다라고 생각했을 거야. 정말 넓다. 물도 맑아. 공기도 맑고. 사실, 대충 보면 동해바다 같기도 해. 아무래도 바이칼 호수는 꽝꽝 얼었을 때 매력을 더하나 봐. 다시 올진 모르겠지만 다음이 있다면 한겨울에 와봐야겠어~
네가 어제 오물 먹자고 해서 깜짝 놀랐어. 오... 오물을 먹자고? 알고 보니 오물이 바이칼호수에 사는 물고기 이름이더라. 그래, 특산물을 먹어주는 게 여행 아니겠니. 우리나라도 바다 앞 시장에 횟집이 있는 것처럼 여기도 있더라.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서 구운 오물을 시켰어. 민물생선이라서 회는 없는 것 같아. 구운 생선이라 그런가 조기랑 맛이 비슷하더라. 구운 생선은 사실 나한테 다 비슷해. 오물 맛은 그저 그랬지만, 야외테라스에서 햇빛을 맞으며 너와 오물을 먹는 그 순간은 좋았어.
리스트비얀카를 떠나 다시 이르쿠츠크 시내로 돌아왔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이르쿠츠크의 대표 관광지인 카잔성당으로 향했지. 처음으로 러시아 성당을 갔을 때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 내가 기존에 알던 성당과 느낌이 달랐거든. 벽화에 원근감이 거의 없는 것이 르네상스 이전의 그림인 듯해. 무엇보다 벽화의 눈빛이 좀 무서워. 알고 보니 러시아의 성당은 로마 가톨릭교가 아니라 동방 정교회의 것 이래. 그래서 건축양식과 벽화의 느낌이 달랐나 봐. 세계사 수업에서 동방 정교회에 대해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카잔성당에서 나오니 노을이 지기 시작했어. 열차에서 먹을 과일과 채소를 사기 위해 근처 시장으로 향했지. 방울토마토 한 봉지, 체리 한 봉지 그리고 오이 네 개. 모두 다 열차에서 먹을 때 칼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야. 캐릭터가 아이템을 주우러 다니듯이 시장을 누비는 와중에, 어떤 청년이 지나가면서 나한테 ‘그라씨바’라고 하는 거야. 내가 또 3년 전에 러시아 야매로 회화를 배웠잖니. 그래서 알아들어 버렸어. ‘그라씨바’는 ‘예쁘다’는 뜻이야. 참고로 러시아어는 여성어와 남성어가 있기 때문에 여자에게는 ‘그라씨바야’, 남자에게는 ‘그라씨브이’라고 하면 된대. 한국욕처럼 들려서 종종 ‘그라씨바야’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그걸 오늘 들을 줄 몰랐네. 러시아어에는 한국욕 같은 게 좀 많아. ‘쓰바씨바’는 ‘감사합니다’. ‘실수하다’는 ‘아씨밭자’야. 너도 이제 ‘쓰바시바’는 외웠으니까 ‘그라씨바’도 외워서 다음 도시에서 써보자.
무사히 이르쿠츠크 여행을 마친 후, 우리는 기차역에서 샤워를 했어. 열차에 타기 직전까지 깨끗함을 유지하고 싶어서 유료 샤워실을 사용했지. 뽀송뽀송하다. 캬~ 이번 열차는 저번 보다 신식이래. 기대된다. 열차 안에 샤워실도 있대. 못 참겠으면 열차 내에서도 샤워하자.
이르쿠츠크에서 우리는 부지런히 포션을 충전했던 것 같아. 샤워도 하고, 한식당에서 한식도 먹고, 신선한 과일과 야채 그리고 과자와 요거트까지 충전했지! 물론 모든 아이템을 구하느라 호스텔에 너무 늦게 돌아가서 사장님께 혼났지만… 약속시간이 되었는데도 안 와서 얼마나 걱정하셨을까. 이 도시에서 음식뿐만 아니라 좋은 기억까지 충전한 것 같아. 쓰바시바! 그리고 바이칼 호수는 생각보다 더 아름다웠어. 그라씨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