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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끄로 Jan 15. 2024

어리둥절 횡단열차

첫 번째 시베리아 횡단열차

초초에게


 횡단열차를 타기 직전, 종이 티켓을 받기 위해 역사를 헤매던 중 한국인 부부를 만났잖아. 우리 부모님 연배 정도 되는 돼 보이는. 그렇게 나이 들고 싶더라.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도시에 가기 위해서 횡단열차를 탄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어. 쉬운 도전은 아니니까. 거기다 은퇴하고 부부가 함께 여행하는 게 멋지더라고. 그 나이쯤의 내가 궁금해졌어. 우리는 나이 들어서 어떤 사람들이 되어있을까?


 지금의 나는 겁이 많은 사람 같아. 겁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씩씩하게 다니는 널 보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여기가 맞나, 차는 왜 이렇게 많나, 이상한 사람 있으면 어쩌나, 이걸 꼭 해야 하나 하면서 긴장되는 마음을 가지고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을 다녔어. 기차를 탄다는 설렘보다 두려움이 컸는데 나를 열심히 이끌어주는 널 보고 겁을 좀 내려놨어. 또 혼자보단 둘이어서 용감해질 수 있었어. 특히 초초 너랑 와서 더. 네가 얼마나 찾아봤는지 잘 알아서 믿음직했거든.


 어두워서 앞은 잘 안 보이지, 우리가 탈 기차 칸은 너무 멀지, 와중에 내 캐리어와 보스턴 백은 물건으로 가득 차서 너무 무겁지, 자꾸 뒤처져서 미안했어. 얼른 타서 쉬고 싶은 마음에 ‘여기 맞아?’, ‘여기 어디야?’라는 질문 세례를 퍼부었는데 버리지 않고 잘 데리고 타줘서 고마워. 가뜩이나 플랫폼도 어수선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학생 무리가 한가득이어서 네가 많이 걱정하는 게 눈에 보였어. 거기에 나까지 너의 걱정이 되었나 마음이 안 좋았어.

 다행인 건 우리의 걱정과 달리 횡단열차가 순조롭게 출발했다는 거야.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차는 조용해졌고. 우리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 찾아온 소녀들 덕에 횡단열차의 시작이 참 좋았어. 우리 둘이 딱 그 나이 때 연예인 얘기하다 친해졌잖아. 그런 것도 새록새록 떠올랐어. 애들이랑 언어가 통하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꽤 많을 텐데, 번역기로는 한계가 있네. 횡단열차에서 만날 인연을 꽤 기대하고 왔는데 이렇게 빨리 귀여운 인연을 만날 줄 몰랐어. 벌써 좋은 추억 하나 적립한 느낌이야.


 번역기에 나중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소녀들이 떠났고, 밤이 찾아왔어. 잘 준비를 하며 선뜻 2층 침대에서 자겠다고 해줘서 고마워. 도저히 2층 침대에 못 올라가겠더라. 너도 봤겠지만 도전했는데 실패했잖아. 다리를 올리는 순간 무서움이 확 느껴졌어. 우리 바꿔가면서 자야 할 텐데 걱정이야. 몇 번 해보면 익숙해지겠지?


 사실 아직까지 모든 게 어리둥절해. 글씨도 모르겠고, 까막눈이 된 기분이야. 어디가 어디인지도 잘 모르겠고. 네가 키릴 문자를 읽을 줄 알아 다행이야. 잠시 내려서 바깥공기 쐬고, 구멍가게에서 일용할 양식 사려면 어디인지, 정차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야 했잖아. 너 아니었으면 타기 전에 사 온 음식들 아껴 먹으면서 버텼을 것 같아. 말도 안 통하고 글자도 하나도 모르겠어서 답답했어. ‘여기 어디야?‘ 하며 지도를 봐도 휴대폰이 잘 안 터져서 확인도 어렵더라. 휴대폰은 정차역에서 겨우 켜지고 궁금한 게 생겨도 바로 알아볼 수 없는 게 아쉽더라. 스마트폰이 참 편리한 거구나 새삼 느꼈어.

 분명 기차 내에서 정차 시간을 확인했었는데 착오가 있었나? 우리 열차 못 탈 뻔한 게 당황스러웠어. 누군가에게 번쩍 들려본 게 영유아 시기 때 말고 처음인 것 같아. 갑자기 플랫폼이 조용해졌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해. 뭔가 이상하다 느낄 새도 없이 러시아어로 막 말하는 승무원들. 갑자기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열차로 태워버린 승무원. 어느 칸에 탄지도 모르고 어리둥절. 그 상태로 우리 자리로 돌아왔어. 그 덕에 횡단열차 투어 한 번 했네. 열차에 타고 나서야 당황스러움이 몰려왔고,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 큰 일 날 뻔했구나 싶더라. 열차 바로 앞에 있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멀리 있었으면 우리 짐도 없이 국제 미아 됐겠어. 근데,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어. 당황한 것도 잠시 우리 둘 다 웃겨서 열차 사이에 서서 깔깔 웃었던 게 계속 선명해. 다른 일 보다 더 뚜렷이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아.


 어젯밤 횡단열차를 탈 때부터 지금까지 어리둥절, 요절복통 폭풍이 지나갔어.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생길지 많이 기대가 돼. 처음에는 '답답하면 어쩌지', '내려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게 되는 거 아닌가?' 하며 걱정이 많았어. 근데 이제 그런 걱정은 다 사라졌어.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발생해서 너무 신나! 이르쿠츠크까지 남은 시간 동안, 또 모스크바까지 가는 기차에서도 이렇게 어리둥절 재미있는 일 많이 만나보자.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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