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시베리아 횡단열차
솜에게
방금 하바롭스크 기차역에서 소녀들이 내리고 열차 안이 조용해졌어. 어젯밤에 정신없이 횡단열차에 올라타면서 저 무리들만 같은 칸에 안 타길 바랐는데, 옆자리더라. 수학여행 온 10대 소녀들이 야간기차를 탔다? 이건 잘못 걸린 거지.
열차 안이 얼마나 시끄러울까 걱정하며 짐을 풀고 침대를 세팅하는데, 소녀들 중 몇 명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지.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좋아하며 방탄소년단 팬이라고 밝혔고. 그리고 인스타 맞팔까지 했잖아. 나는 3년 전에 러시아에 왔을 때도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청소년들이랑 셀카를 찍었어. 그때는 방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 밖에 몰랐지만, 지금은 수록곡까지 찾아 들을 정도로 좋아해. 방탄소년단 덕분에 나까지 연예인이 된 것 같은 경험도 해보네. 역시 두유노우 bts. 최고.
소녀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용대회에 참여한 후 하바롭스크로 돌아가는 중이라 그런지 남은 에너지가 없었나 봐. 자리로 돌아간 뒤에 금방 조용해졌어. 하바롭스크 역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0시간 밖에 안 걸린다는 사실이 아쉽더라. 열차에 타자마자 잠잘 시간이 된 것도 아쉬웠어. 우리의 열차가 밤출발이 아니라 낮출발이었으면 더 재밌게 놀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소녀들과의 대화에서 밝은 에너지를 얻어서인지 열차에서의 첫날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어. 나는 2층 너는 1층에서 잠을 잤는데, 네가 침대 아래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 안심이 되더라. 혼자 왔으면 어쩔뻔했냐. 그래도 흔들리는 열차에서 누워 자는 건 처음이라 한 시간마다 깬 것 같아.
아침에 소녀들과 작별인사를 하자 열차는 더 고요해졌어. 통로에 앉으신 아저씨와 아줌마는 우리에게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옆에 앉으신 할아버지는 계속 주무셔. 내가 봤던 횡단열차 브이로그에서는 주변 사람들이랑 재미있게 웃고 떠들던데. 우리는 주변이 전부 어르신들이라 그런가 다들 조용하시네. 이렇게 정적일 줄 몰랐어. 나 혼자 탔다면 묵언수행 했었을 거야.
5월이라도 시베리아는 꽤 추워서 열차안도 추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난방 정말 잘된다. 자다가 좀 더웠잖아. 시설을 기대하지 않아서 그런가 생각보다 지낼만한 것 같아. 그래도 화장실은 쉽지 않네. 옛날 무궁화호의 화장실이 생각나. 우리가 탄 열차가 구식열차라 그런가 봐. 그래도 우리 다음에 탈 열차는 신식열차라고 했으니까 조금 더 기대해 보자. 우리 얼른 편지 다 쓰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시자. 횡단열차에서의 첫끼는 도시락 컵라면이야. 내 마음대로 정해봤어. 근데 한국의 도시락 컵라면이 왜 러시아에서 인기가 많을까? 다른 맛있는 컵라면도 많은데. 일단 먹으면서 생각해 보자.
열차에 타자마자 하룻밤이 지났으니 2일만 지나면 다음 도시에서 내리겠다. 우리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들을 실컷 하자. 너의 퇴사 이야기, 나의 임금체불 이야기, 앞으로 복학하고 하고 싶은 일까지. 우리의 여행은 아직 한참 남았어! 재밌게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