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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끄로 Jan 10. 2024

나의 첫 번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초초에게

새로 산 카메라를 들고 장기 여행을 시작했어. 중학교 때부터 늘 같은 DSLR만 들고 다녔는데, 그 무거운 카메라가 여행에 방해가 되더라고. 이번 여행부터는 조금 더 가볍게 여행을 다니고 싶어서 큰 마음먹고 똑딱이 카메라를 구입했어. 몇 년 만에 사는 새 카메라라니. 처음을 너랑 같이 해서 참 좋다. 우리 중학교 때 둘이 카메라 들고 출사 나가서 사진도 찍고 그랬었잖아. 그게 우리의 복선이었을까? 새 카메라를 들고 너랑 같이 여행을 하네.


 새로운 것을 사서 좋긴 한데, 나는 내 욕심 버려야 할 것 같아. 여행 간다고 신나서 면세점 쇼핑을 잔뜩 했잖아. 여행에서 내 마음을 채워가는 걸로도 충분할 텐데 물질적인 욕망만 잔뜩 채워가는 느낌이다. 앞으로 이 짐더미를 이고 지고 갈 곳이 많은데, 짐 걱정에 마음의 짐까지 더해진 느낌이야. 왜 욕심을 못 버리고 늘 후회할 소비를 하는 걸까? 미니멀리스트인 너를 본받아야 할 것 같아. 나의 버킷리스트에 미니멀리스트 되기 하나를 추가해 보려 해. 짐이 가벼워지는 만큼 내 걱정의 무게도, 종류도 조금은 덜어지지 않을까?


 짐 걱정 말고도 걱정거리가 하나 더 있어. 여전히 혼자 여행하는 도시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다는 거야. 하면 되는데 왜 늘 미루고 걱정만 하는 걸까? 너는 여행 준비하면서 착착 끝냈는데, 그걸 보면서 참 대단하다고 느꼈어. 나는 늘 찾아보는 게 귀찮아서, 혹시나 좋지 않을까 걱정돼서 미루고 또 미루거든. 미룬다고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는데 말이야.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잘 도착했으니 지금은 우선 이 도시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어.


 2년 전 딱 이맘때였어. 뮤지컬 <밑바닥에서>를 보고 <블라디보스톡의 봄노래>를 좋아하게 됐어. 그리고 막연히 한 번쯤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이 노래를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 그런데 정말 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왔어. 그리고 오늘 블라디보스톡의 봄노래를 들으면서 길을 걸으니까 좋더라. 음악은 우리를 과거의 어느 한 시점으로 데려다주는 것 같아. 예전에 스위스 여행했을 때 들었던 노래를 지금 들으면 내가 다시 스위스에 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이 들거든. 오늘 이 노래도 나중에 들으면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줄 것 같아.


 노래 가사를 들으니 바다가 어는 겨울의 블라디보스토크도 궁금해졌어. 너는 겨울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왔었잖아. 네가 전해준 겨울의 블라디보스토크가 내 눈에도 그려지는 것 같았어. 그래서 실제의 차가운 이곳이 더 궁금해졌고. 바다가 어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더 보고 싶어. 기약 없는 그 언젠가의 겨울에 다시 한번 와 보려고. 같이 오면 옆에서, 같이 오지 않는다면 또 이곳에서 편지를 써서 너에게 전할게.


 21살에 갔던 라오스 기억하지? 바닷가 걷다가 라오스 현판을 발견했잖아. 그때 초초의 첫 해외여행이자 우리 둘의 첫 여행이었는데, 어느새 커서 같이 여행을 왔네. 그때는 내가 꽤나 주도적으로 여행 일정도 짜고 이것저것 알려줬잖아. 이번에는 그때만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서 미안해. 약간 조별과제 무임승차한 기분이었어. 하지만, 알지? 나는 다 좋아. 처음 오는 곳이기도 하고, 너를 믿거든. 라오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너랑 같이 여행하면 재밌는 일이 많을 것 같아.


 너와 여행해서 다행인 게 우리 둘 다 가리는 음식이 없잖아. 메뉴 정할 때 너무 편해. 거기다 이번에는 네가 가본 레스토랑들로만 선별해서 나를 데리고 갔잖아. 아침에 간 팬케이크 가게랑 저녁에 간 햄버거 가게! 둘 다 정말 맛있었어. 음식 때문에라도 여기 또 오고 싶을 것 같아. 덜 우러난 차를 따른 것부터 시작해서 찢어진 장갑 끼고 먹으려 했던 햄버거까지 밥 먹으면서도 재밌는 일화들을 꽤나 쌓았다. 그렇지?

 나는 서점 가는 것도 좋아하고, 책 사는 것도 좋아하는데 여행 기념품으로 책을 살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어. 근데 네가 여행지에서 그 나라 언어로 되어있는 어린 왕자 책을 산다고 했을 때 이거다 싶었어. 그동안은 그냥 뻔한 마그넷과 엽서만 모았는데, 이건 날 위한 선물이잖아? 그래서 나도 널 따라 어린 왕자를 사기 시작해 보려고. 모아두고 읽지 못하겠지만 그냥! 난 어린 왕자도 좋아하고, 언어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네 덕에 새로운 것들을 많이 한다. 순간, 순간을 설레게 만들어줘서 고마워.


 설레는 순간이 많지만 사실 아직까지는 러시아가 조금 무서워. 뉴스에서 스킨헤드, 푸틴 이야기만 듣던 곳이어서. 거기다 우리 둘 다 겁쟁이라 스킨헤드는 빠박이, 푸틴은 불곰짱이라고 코드네임을 정했지. 러시아 떠날 때까지 기억하자.


 블라디보스토크를 즐기기보다는 걱정이 앞섰던 것 아닌가 아쉬움도 좀 남아. 만 하루밖에 안 되는 짧은 여행 기간도 아쉬워. 여행 일정이 더 길었으면 좋았을까? 미련이 남아서 더 좋은 거겠지?


 이제 곧 진짜 횡단열차 탄다. 우리 여행의 목적. 너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이룬 걸 미리 축하해. 나도 이 여행에서 새로운 버킷리스트를 찾기로 결심했어. 막연한 생각만 있고 구체적인 뭔가가 없거든. 깊게 고민해 본 적도, 적어본 적도. 너의 버킷리스트 덕에 귀한 경험을 하는 게 참 좋아서 나도 이제 구체적으로 써보려고.

 

 오늘의 짧은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이 좋았던 만큼 우리의 여행이 다 좋았으면 좋겠어. 블라디보스토크의 봄을 행복하게 보내주며 횡단열차에서의 봄을 지나 이르크추크의 봄에 닿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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