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버 May 14. 2017

삶의 부조리 앞에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료타는 대기업 직원이자 단란한 가정의 가장으로, 남 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다.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중 아들 케이타가 태어난 병원으로부터 케이타는 친자가 아니며, 친자는 유다이의 아들 류세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키운 정과 낳은 정 사이에서 고뇌를 하던 료타는 결국 류세이를 데려오고 케이타를 보내기로 한다. 그러나 그는 바뀐 가정환경에 혼란을 겪고 상처를 받은 아이들을 보게 되면서 핏줄에 집착하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케이타에게 용서를 구한다.     


 료타는 완벽주의자다. 가정보다 자신의 커리어를 더 중시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이면서, 아들 역시 완벽한 아이로 키우고자 하는 욕심도 큰 사람이다. 아무리 해도 피아노 실력이 늘지 않는데도, 억울해하지 않는 케이타는 그에게 있어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케이타가 자신의 친자가 아님을 알고서 ‘역시 그랬군’이라고 말한 료타가 어색하지 않은 이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들이 바뀐 것을 몰랐다는 아내에 화가 나지만 겉으로는 아니라고 잡아떼는 위선자이기도 하다. 료타는 아버지보다 오히려 ‘양육자’라는 단어가 더 적합해 보인다. 

 하지만, 이처럼 단단해 보이는 료타 역시 삶의 부조리 앞에서는 거칠게 흔들린다. 그나마 자신과 아이를 연결하고 있던 ‘피’라는 고리 자체가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삶의 부조리’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비록 간호사의 우발적인 질투심에 의해 발생한 것이기는 하나, 그를 아무리 질책해봤자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이처럼 예상치 못한 삶에 충돌했을 때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료타의 성찰적인 태도로부터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지난 행적을 그려보고, 반성하며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직계 혈통만을 고집하는 세상에 대해 긍정과 부정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고뇌한다. 그 성찰을 통해 얻은 열매는 케이타 앞에서 흘린 눈물에 매달려있다. 그것은 세상이 정해놓은 편견에 기대서 아이를 바라본 것에 대한 속죄의 행위이자, 진정한 ‘아버지’로 나아가기 위한 첫 걸음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동시에 삶의 태도에 대해서도 묻는다. 이 질문에 답은 어른이 아닌, 아이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의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엄마아빠를 사랑해주고 바라봐준다. 그러나 정작 그 엄마아빠는 그들이 정해놓은 기준을 아이에게 갖다 대고 거기에 맞게 성장해주기를 요청한다. 부모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세상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서 그저 아이와 함께 뛰노는 것임을,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타자화의 지독한 현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