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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버 May 21. 2017

비극이 비극인 이유

영화 '어둠속의 댄서' 리뷰

*스포일러 주의


 셀마에게는 뮤지컬만큼이나 사랑하는 아들 진이 있다. 그녀는 시력을 잃어가는 자신의 병을 물려받은 진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체코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이주해 밤낮으로 공장 일을 하며 살아낸다. 그러던 어느 날, 집주인 빌이 그의 딱한 사정을 늘어놓으며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셀마는 아들의 수술이 가장 중요하므로 완곡히 거절한다. 이에 빌은 도덕적으로 잘못됨을 알면서도 그녀를 모함해 돈을 갈취하려고 한다.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돈을 주지 않겠다는 빌의 협박에, 셀마는 그를 총으로 쏴 죽인다. 그녀는 그렇게 되찾은 돈을 아들 수술을 맡아줄 병원에 지불하고, 살인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친구 캐시가 그녀를 구제하기 위해 그 돈을 새로운 변호사 선임하는 데 쓰자, 셀마는 분노하며 유예를 거부한다. 그렇게 그녀는 아들에게 빛을 주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셀마의 삶은 어둠 그 자체다. 앞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어린 아들을 홀로 키워내야 한다. 그러나 미국 워싱턴에서 체코 이민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저임금 공장인부뿐이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자주 ‘어둠이 없는’ 뮤지컬 세상 속을 유영한다. 그 세계 속에서 셀마는 리듬감 있는 기계소리에 맞춰 발을 구르고, 목소리 높여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세계는 현실의 가장 우울한 순간에 만들어지고, 지극히 현실적인 서사들로 가득 차 있다. 공장에서 잦은 실수를 할 때, 시력을 잃었을 때, 빌을 죽이게 되었을 때, 사형선고를 받을 때, 심지어는 죽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마치 구원을 바라는 듯 노래를 한다.  

 그러나 셀마는 끝까지 정당방위로서의 살인이었다고 변론하지 않는다. 이유는 사형을 선고받음으로써 친구 빌을 죽인 죗값을 치루기 위함이다. 동시에 유전병임을 알면서도 진을 낳은 것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낳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앞에 찾아온 생生의 빛을 껴안았다. 그리고 몸을 던져 아들의 생을 치열하게 책임지고 떠난다. 하지만 이것은 우발적인 선택이 아닌, 만반의 각오를 한 결단이었다. 셀마가 부른 노래 <I’ve Seen It All>의 가사 중 그녀의 삶 자체를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I’ve seen what I was and I know what I’ll be’. 본인의 삶을 저 위의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관망하며, 비극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그 비극 속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간다.      


 셀마는 마치 인간세계 너머의 신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그리스 비극이 비극인 이유는, 앙드레 보나르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이 신에 대항하여 무모한 싸움을 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안 되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포기하는 법이 없다. 그 한계를 뛰어넘어 신처럼 존재의 기쁨에 충만하기를 바란다. 셀마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면 안 될 줄 알면서도 진을 낳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빌을 죽이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죽이고 이후에도 도망치지 않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비극이 위대한 이유는 삶의 모순 앞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절망하지만, 그럼에도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내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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