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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버 May 29. 2017

누구를 위한 삶인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윗주머니까지 양팔을 올릴 수 있나요?’ ‘모자를 쓰듯 양팔을 높이 올릴 수 있나요?’ 심장병으로 인해 평생 해오던 목수 일을 못하게 된 다니엘 블레이크가 받은 질병수당 지급자격 질문이다. 심지어 그 신청은 기각되고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구직활동을 하라는 공식 지침을 받는다. 두 아이의 엄마, 케이티 역시 런던의 집에서 쫓겨나 뉴캐슬의 전기가 나오지도 않는 집으로 오게 되었다.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로 보조금 제재 대상으로 분류되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생활을 이어나간다. 다니엘은 비슷한 처지의 케이티에게 연민을 느끼고 먼저 손을 내밀어주고 서로서로 의지하며 살아낸다. 그러던 중 다니엘은 질병수당지급 기각에 대한 항고 신청을 하기 위해 케이티와 법원으로 가지만, 항고하기도 전에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복지란 무엇인가.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한 시민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 아니, 일을 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사탕발림이다. 국가가 정해놓은 질병수당 자격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자는 강제로 ‘일을 할 수 있는 자’로 구분되고, 그는 구직활동의 증명을 통해 보조금을 지급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자신의 환부를 꺼내어 증명하게끔 하는 잔혹한 복지시스템 속에서 다니엘은 헤어 나올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케이티의 사연은 더 처절하다. 정부보조금마저 끊겨 며칠을 굶은 그녀는 결국 식료품 지원센터에서 받은 통조림을 손으로 허겁지겁 퍼먹고, 슈퍼마켓에서 생리대를 비롯한 여성용품을 훔친다. 아이들에게 신선한 과일을 먹이고 싶은 마음에 케이티는 아이반이라는 남자의 권유로 매음굴에 들어가게 된다. 케이티의 처연한 사연은 복지라는 가면을 쓴 자본주의 사회가 한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바닥으로 끌어내리는지 한눈에 보여준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라는 다니엘의 말처럼, 한 개인은 알량한 복지를 제공받는 대가로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을 저당 잡힌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잃은 다니엘은 결국 법원 화장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국가 복지제도의 폐부를 까발린 장렬한 죽음이다. 다니엘은 생전에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의탁하거나 구걸한 적이 없었으며 비합리적인 복지제도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시청 벽에 라커로 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한 시민이었다. 물론 그것은 마지막으로 힘겹게 짜낸 목소리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자신의 목구멍이 포도청인데도 다니엘은 케이티에게 나무껍질같이 투박한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었다. 케이티에게 진정한 복지를 제공해준 것은 정부도 공공기관도 아닌, 다니엘이었다.

 우리의 삶은 누구를 위한 삶인가. 아니 질문을 조금 바꿔서, 누구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다니엘 블레이크가 그 답을 알려준다. 우리는 복지제도의 모순을 온몸으로 보여준 채 떠난 다니엘 블레이크의 죽음을 기억해야하고, 그의 대가 없는 사랑을 배워야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목소리를 빌려 사용자나 고객이 아닌, 시민이자 한 명의 사람으로서 살 수 있는 사회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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