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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버 Feb 22. 2018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이들에게

[브런치 무비패스] 영화' 리틀 포레스트' 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자주적인 삶을 살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할까.' 요새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 생각 속에 들어앉아있다. 내가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원치도 않는 별명으로 불리는 나는, '취준생'이다.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보내는, 그렇다고 부담이 덜어지지는 않는 친구들의 격려와 친척들의 고맙지 않은 염려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사실 그 어떠한 말도 고막에 고이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던 찰나 브런치 무비패스 <리틀 포레스트>시사회에 초대받았다.


과거의 혜원

 혜원은 임용시험에 붙은 남자친구와 헤어짐을 준비하는, 시험에 떨어진 임용고시생이다. 그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배가 고파서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간다. 말 그대로 정말 '배가 고파서'이다. 고향에 내려가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거나 누군가의 위로를 받는다거나 하는 그러한 허울 뿐인 귀농이 아닌,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편의점 도시락에 성이 차지 않아 내려간다. 그렇게 서울을 떠나 돌아온 집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자리를 깔고 누울만한 이불과 식기, 그리고 약간의 냉기다. 고향에서 나고 자라 은행원으로 살아가는 친구 은숙과 도시의 일에 지쳐 농부로 살아가는 재하만이 그를 반길 뿐이다.

그냥 지금의 송혜원

 사실 혜원은 엄마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고3, 아직 고등학교를 채 졸업하지도 않은 혜원의 곁을 떠난 건 다름아닌, 엄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떠났다거나 병마를 이기지 못해 세상을 떠난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떠난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은 타이밍'이라며, '자신은 지금 잠시 혼자 있어야만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떠난다'는 어린 혜원에게는 어렵기만 한 문장들만 늘어놓고 떠났다. 엄마가 갑자기 떠났다는 황망함과 함께 혼자서도 잘 살아보겠다는 오기가 혜원을 성장하게 했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녀 역시 그의 엄마처럼 잠시 멈춰섰다. 그리고 이제서야 쪽지의 내용을 가만히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의 일상은 이렇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닭장에 들어가 계란을 꺼내들어 밥을 해먹고, 소 여물 주고 밭 일을 하다가 잠시 허리를 필 때쯤이면 해가 중천에 떠 있어서 점심을 먹어야 한다. 점심을 먹고 큰 고모 논에 가서 일손이 되어주었다가 밤이면 김치전과 막걸리를 만들어 은숙과 재하를 불러들여 지는 달과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 여기에서는 닭장에 갇힌 닭처럼 학원에 갇혀 책만 들여다보는 일도, 취객에게 육두문자를 들어가며 편의점 월급을 받아야 하는 일도, 상사의 침 튀기는 분노를 받아내야만 하는 일도 없다.

 혜원은 그저 봄이 되면 아카시아를 따서 튀겨 먹고, 가을이 되면 밤을 따 먹고, 겨울이 되면 가을에 따 놓은 감을 한 데 엮어 말랑해지기만을 기다린다. 자전거를 타며 두 뺨을 스쳐가는 바람결을 느끼고, 내리쬐는 볕에 흘러내리는 구슬땀을 닦아내며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면 삽으로 쌓인 눈을 퍼서 길을 낸다. 나는 새삼 '잘 먹고 잘 살자'라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어느 집의 가훈이 지금의 나이에서야 가장 이상적인 문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한 계절, 계절을 음미하다보니 '잠깐만 있다가 올라갈거야'라는 말이 무색하게 어느 새 고향으로 온 지 1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 '아주나기'를 준비한다. 어쩌면 혜원은 어떠한 사회적 지위, 자신만이 세워놓은 가치관을 좇다 지쳐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그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다른 답을 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는 '이렇게 해야겠다' 혹은 '저렇게 해야겠다'라는 혜원의 다짐이 엿보이지 않아서 좋았다. 우리는 습관처럼 스스로를 다그치고 늘 지키지도 못할 다짐들을 한다. 그러나 혜원은 그저 아무 말 없이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아무 말 없이 다시 도시로 돌아가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가까운 미래를 바라보기보다 바로 이 지금, 현재에 집중한다.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이 있다. '우리들은 우주 속의 아주 작은 먼지라는데 먼지치고는 고생이 너무 많다'고. 자소서를 쓰다보면 어떠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으며 또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묻는 항목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무언가를 이뤄내야 할 것도, 이유도 없다. 그냥 태어났을 뿐이고 숨이 붙어있어서 살아 움직일 뿐이다. 그러니 가끔은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덜어내도 좋다, 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는 요즘에 만나서 반가운 영화 <리틀 포레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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