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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버 May 26. 2018

JUST GO FORWARD

[브런치 무비패스]'스텐바이 웬디' 영화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월화수목금토일 정해진 색깔의 티셔츠를 입고, 어릴 적 한번도 지키지 않았던, 방학계획표처럼 촘촘하게도 짜여진 보호소의 하루 일과에 강박적일 정도로 충실하는 웬디. 여기서 어느정도 예상했다시피 그는 자폐증을 앓고 있다. 어느 날, 저녁 일과인 TV프로그램을 보던 중 웬디의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일이 일어난다. 바로 영화 '스타트랙' 시나리오 공모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철저하게 지켜오던 보호소와 자신만의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무려 427장이나 되는 시나리오를 밤새도록 써 완성한다. 유일하게 의지하던 보호소장 스코티와 언니 오드리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주지만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에 웬디는 상심한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정해진 형식, 정해진 장소, 정해진 날짜에 우편으로만 접수가 되는 시나리오를 LA 파라마운트 픽쳐스에 직접 가기로 한다.


이전에 영화 '말아톤' 촬영 당시에 했던 조승우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자폐아 초원이를 연기한 그는 초원이를 '자폐(閉)아가 아닌 자개(開)아'라고 묘사한 것이 뇌리에 박혀 아직도 생각이 난다. 초원이는 닫혀있는 아이가 아니라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는 순수한 아이라고 했다. 웬디 역시 그렇다. 언뜻 보면 보호소장이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정해놓은 엄격한 규칙에 얽매여 사는 아이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다양한 생각으로 열려 있기에 세상의 규칙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해서는 안되는 일'에는 정성들여 설명하고 당부하지만 정작 '해도 되는 일' 혹은 '하고 싶은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강아지 피트를 포함해 웬디의 몇 안 되는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스코티 소장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늘 세세하게 웬디의 감정을 확인하고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스코티지만, 웬디의 안위에 대한 단순하지만 공고한 염려는 웬디가 더 큰 세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래서 스타 트랙 시나리오 공모전에 지원하고 싶어하는 웬디의 소망보다 당장의 웬디가 아르바이트를 잘 하고 돌아오는지, 저녁은 먹었는지에 대해서만 신경을 곤두세운다. 언니 오드리 역시 마찬가지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혼자 웬디를 책임져야 했던 그는 가정과 아이가 생긴 뒤 웬디가 버거워져 보호소에 맡겼다. 종종 찾아오지만 올 때마다 왠지 모를 죄책감에 마음과 발걸음, 그리고 입이 무거워진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우체국에 보내기 위해 나가자는 웬디의 말도 무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웬디는 스스로 움직여야 했다. 우편으로 보낼 수 없으니 직접 발품을 팔아 427장의 시나리오를 내고야 말겠다는 의지, 아니 의지를 넘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자가 내뱉는 마지막 숨이다. 자신만의 세계가 담긴 글을 쓰는 일이야말로 그가 유일하게 하고 싶어 하는 일이자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세상은 오롯이 그녀의 것이다.

물론, LA까지 가는 길은 험난하고 또 험난하다. 시장거리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웬디다. 그가 걸어야할 길은 눈에 훤하게 보이듯 가시밭길이다. 일단, 버스타는 것부터 난관이다. 버스를 어디서 타야하는지, 버스비는 얼마인지, 티켓은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등 수많은 과제들에 부딪쳐 겨우 버스에 올랐건만 피트를 데리고 탈 수 없단다. 그래서 가방안에 구겨넣듯 피트를 넣고 피트와 주변 꼬마아이의 입단속까지 시킨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피트의 생리현상으로 인해 버스에서 하차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좀도둑에게 아이팟과 현금마저 빼앗긴다.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실버타운에서 잠시 마실나온 할머니의 도움으로 버스를 얻어타게 되지만 얼마가지 않아 그만 교통사고가 나 병원신세를 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시나리오마저 분실하게 된다. 역시 인생은 새옹지마다. 실로 탄식을 부르는 고된 여행길이다. 그럼에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웬디는 자신이 쓴 '논리적인 결론은 전진입니다.'라는 대사를 보게 되고 분실된 시나리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새로 써내려가며 뒤따라온 스코티와 오드리, 경찰관의 도움으로 무사히 시나리오를 접수한다.


무엇보다 가장 유쾌했던 캐릭터는 경찰관이다. 덕후의 마음은 덕후만이 안다고 했던가. 경직된 웬디에게 '클링온어'로 대화를 시도할 정도로 그 분 역시 스타트랙 덕후라 웬디의 대서사시를 읽고 감탄하며 행운을 빌어준다. 타인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손끝만 스쳐도 어깨를 움츠리던 웬디는 그제야 처음으로 타인과 눈을 맞췄다.


헤르만 헤세의 명작, 데미안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 떠오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자신의 한계, 타인의 훼방, 그럼에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논리적인 결론은 전진뿐이다. 소심한 덕후가 덕밍아웃을 거쳐 성덕으로 나아가는 고된 여정길 위에서 함께 걷는 듯한 영화 <스탠바이, 웬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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