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근근이 살아왔다.
나의 표면적인 삶에 대해 나열해 본 적이 없다. 현재의 삶에 비추어 과거를 표현해 본다면 ‘근근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당하다. 하루하루 적은 돈으로 근근이 먹고 살아갔고, 근근이 술을 마시고 자주 취했다. 삶의 목적은 없었지만 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삶의 목적을 긁어모으려 노력하며 방황했었다.
어느 날도 또한 여유가 생겨 친구와 함께 낮부터 술을 마셨다. 간단히 와인을 마시고 좋은 날씨와 여유에 흥이 돋아 계단에 앉아 남산을 바라보며 맥주 한 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는 바에 가서 또 한 잔, 춤을 추다가 신이 나서 또 한 잔.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어 집에 돌아온 나는 술병을 지독하게 앓았다. 으레 하듯 알약을 대충 털어 넣고 라면 따위로 허기를 채우고 다시 일을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며칠이면 금방 털고 일어나야 하는데 좀처럼 잘 낫지를 않아 술병(이라고 믿었다)을 2주를 앓았다. 다른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는데 의사가 내 증상을 듣더니 갸우뚱했다.
“감기나 술병 같지는 않은데, 간단히 소변, 피검사 한 번 해볼래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일주일 뒤 들은 결과는 내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쪽으로 흘러갔다.
“신장병이 있는 것 같습니다. 큰 병원으로 가서 조직검사받아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신장이 어디 붙어있는 건지 그게 왜 안 좋은 건지 이 의사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신장이 안 좋다고? 왜? 내가? 몽롱한 정신으로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해서 검사를 받았다. 조직 검사 결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장병 이름. 처음 겪는 모든 일들이 너무 당황스러워 무섭지 조차 않았다. 그저 짜증이 났다. 이게 뭐 딱 당장 죽을병도 아니고(그때 당시는 그런 마음이었다.) 평생 나를 관리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한다는데, ‘근근’이 호인 나에게는 죽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 이후의 감정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그 일 이후 친구와 울음 섞인 통화하면서 상수 골목 어귀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 뭐랬더라 “죽지도 않는데 점점 나빠지는 상태로 살아남아야 한대 엉엉” 이랬나. 정기적인 검사, 대학병원의 분위기같은 것들에 익숙해지는 것도 정말 싫었다. 건강에 대한 염려보다 변화된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크게 다가왔다. 병원을 다녀온 날이면 꼭 ‘나는 아프지 않다’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보란 듯이 친구를 만나고 밤새 클럽에 가 놀았다. 당연히 매 검진마다 들려오는 결과는 호전될 리가 없었고 몇 개월이 지난 후 나는 나의 상태와 변화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하던 일들도 다 정리하고 살던 집도 정리했다. 부모님 댁에 들어가서 3달은 방 밖으로도 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 의욕을 잃었고 식욕 역시 잃었다. 그 이유가 병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맞지만 아니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병 때문에 무기력한 상황이 조성이 되었지만 세 달 내내 병을 끓어 안고 끙끙 앓으며 살진 않았다. 그냥 그때는 병보다 이별이 더 슬펐다. 사랑했던 사람이든 삶의 방향이든.
그러다 문득 어떻게 살아도 내 삶은 계속 갈 것이며 앞으로 남은 날 중에 오늘이 가장 건강한 날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렇게 단순히 생각했다. 그럼 가장 건강할 때 할 수 있는 걸 많이 하자. 뭐가 있지? 여행, 일 그런 것들 아, 여행 가고 싶다. 그래서 다시 방 문을 열 힘이 생겼다. 그리고 제대로 살아남는 방법을 몰랐던 나는 무작정 외쳤다. 신장을 아끼려면 단백질을 줄여야 한다고? 그럼 고기 안 먹지 뭐. 나 원래도 고기 그렇게 안 좋아했어. 그렇게 베지테리안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입에 올렸다. 그게 현재 내가 비건으로 살고 있는 이유가 되었고 많은 것들이 변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비건을 강요하기 위해서도 전도(?)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있다면 혹은 나 같은 사람을 보고 ‘아, 그렇구나’라고 생각해줄 수 있다면 그게 단 한 사람이라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내 삶과 의식을 기록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렇게 나의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