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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Jan 24. 2022

금호동에서의 마지막 날

찬란한 20대 후반을 보낸 동네 

내일이면 신혼집으로 이사를 간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으로 가다니 우리 이제 성공했다며 웃었지만, 사실은 사랑했던 예쁜 동네 늘 두고 가는 게 꽤나 아쉽다. 우연히 이모와 인도 영화제를 보러 와서 꼭 이곳에서 살아보고 싶다 생각해 온전히 홀로 독립하게 된 곳. 아침마다 새소리에 깨던 곳. 계절마다 자연이 빚어놓은 풍경에 감탄하며 다양한 사유와 함께 끝도 없이 걷게 하던 곳. 한 시간에 한두 번 있는 대중교통으로 내게 자전거 사고와 함께 차를 선물하던 동네. 




남자 친구 딱 한 명 알고 이사 와서 이 지역에서 지금의 기반을 쌓기까지 5년.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하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고마운 곳. 남자 친구 회사랑 걸어서 10분 거리인 이곳, 가구도 몇 없이 자취용품만 가득한 이 집. 초반엔 조용하고 물건도 없고 물고기 소리만 들린다고 엄마가 절간 갔다고 했었는데. 차와 직장이 없을 때부터 지금까지, 추억이 아주 많은 고마운 집.




커뮤니티 공간이 잘 구축된 새 아파트, 더 넓은 평수, 높은 층에 취향에 맞는 새로운 가전과 가구로 깔끔하게 세팅될, 이제는 온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신혼집이 기대되면서도 괜스레 아쉬운 마음이 든다. 가면 그토록 원하던 서재도, 작업실도 방 하나씩 쓸 수 있다며 마음을 다독여보지만 괜스레 집구석구석에 눈길이 가고 찡해진다. 겨울이라 오늘은 마지막 산책도 할 수 없는데. 




이사 와서 공무원 시험 준비하다 4개월 만에 때려치우고 아무것도 없던 내가 잘났든 못났든 지금까지 일어날 수 있었던 아주 고마운 공간. 친구들을 불러 홈파티를 하기도 하고, 수많은 그림과 비대면 강의를 하기도 하던 곳. 택 요리사의 맛있는 요리와 단 둘의 파티도 끝없이 펼쳐지던 곳. 내가 너무나 사랑했던 낡고 예쁜 18평 아파트. 아침 산책마다 풍경을 자랑하느라 단톡방마다 불이 나곤 했었는데..




찬란했던 20대의 추억이 알알이 밴 공간. 앞으로 '20대' 하면 떠오를 아련한 공간, 아름다운 추억이 되겠지. 이젠 정말 30 대구나, 새로운 시작이구나 싶다. 이제는 혼자의 시간을 종료하고, 함께 서로를 품으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지. 




몇십 년이 지나고, 나중에 남편과 "그 금호동 살 때 기억나? 거기 풍경이 너무 예뻤고, 우리 젊을 때 별걸 다 했는데.. 참 그때가 그립다."라고 기억될 공간. 집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면 그간 너무 고마웠다고, 즐겁고 행복했다고 꼭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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