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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Sep 04. 2023

굿바이 20대

거저 얻은 3개월의 20대

생일이 이제 몇 주 남지 않았다. 만으로 29세, 거저 얻은 삼 개월의 20대가 지나간다. 일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비슷하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잘 인사하고 싶어서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좋아하는 재즈 음악을 들으러 부산으로 가려했으나, 스탠딩자리가 없어졌다는 소식에 여수 화양면으로 향했다. 마침 마음이 많이 허하고 외로울 때였다. 문화기획 일도, 미술일도 무언가 하나를 위해 밤낮없이 달리다가 그게 끝나면, 맥이 탁 풀리면서 엄청 허하고 외로워진다. 이번에는 많이 신경 쓰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도, 마음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누가 채워줄 수 없는 나만의 외로움. 마침 속상하던 터였다.


검색해 보니 여수 화양면에 풍경 예쁜 감성 펜션이 있었다. 예약하고, 예쁜 잔과 그릇도 챙기고, 대형마트에서 장도 야무지게 봤다. 여럿이서 놀 때는 자주 하던 건데 또 혼자 놀려하니 생경했다.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 파란 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진 곳 앞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나의 이십 대는 어땠는지. 귀하게 여기는 친구가 이런 허한 마음을 달래려면 꼭 혼자서 피드백하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조언해 줬다. 좋은 말이었다. 일할 때는 항상 피드백 회의를 하고, 결과보고서를 쓰는데 왜 혼자는 그래볼 생각을 안 했을까. 블로그나 브런치라는 좋은 매체가 있는데 말이다.


20대를 돌아보니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힘들었고 애썼던 시간들은 사실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돈과 학점과.. 세상이 중요하다 말하던 건 우스울 정도로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들과 일본에서 맛있는 밥을 먹던 순간, 남자친구와 설렜던 순간들, 친구들과 대학 운동장을 내내 뱅글뱅글 걷던 일, 정우랑 맥주를  마시며 내내 철학적인 이야기를 나누던 일, 약국애들과 깔깔거리고 캠핑에서 진탕 술을 마시던 일. 뭐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즐거웠던 감정들이 기억난다. 아, 자주 웃는 게 결국은 제일 좋은 거구나.


20대에 무언가 내가 이뤘다고 할 수 있을까? 객관적인 세상의 눈에서는 전혀 없다. 집도 전세고, 다른 부부만큼 모으지도 못했고 아기가 빨리 생긴 것도 아니다. 직업은 갈수록 더 불안정해 가고, 영어는 학생 때보다 까막눈이다. 다만 보이지 않는 자원들은 많이 가졌다. 특히 주변에 좋은 사람들만 남겼다. 좋은 이성을 만나 결혼했고, 언제나 날 응원해 주는 사람만 꽉 차있다. 응원하거나, 혹은 내버려두거나. 뭘 하려 할 때, 발목을 잡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누구나 예쁘고 다정하게 굴고, 불쾌하게 하지 않는다. 이런 환경을 세팅하려 사실은 애를 많이 썼다.


언제나 열심히였고, 또 언제나 바빴고, 또 언제나 진심이었던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티를 못 내서 안달이었고, 연애할 때는 다 표현했고, 헤어지면 그렇게 울었다. 마음이 찢겨 나갈 것 같은 순간들은 뾰족이 기억나지만, 이제는 상대의 이름과 얼굴도 희미하다. 지금 내가 다시 그들을 만나면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낄까?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그들도 날 그렇게 생각하겠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려 나름의 노력으로 동동거렸는데, 방법을 모르는 게 훨씬 많았다. 조금 더 살았고, 눈치가 필요한 직군에 있다 보니 이제 눈칫밥은 많이 늘었다.


올해부터 뭔가 궤도에 올랐다는 느낌이 느껴졌다. 노는 것과 커리어의 관계가 희미해졌다. 인간관계에서도 공적 관계가 훨씬 많아졌다. 제안이 아주 쉽게 왔고, 나도 제안할 수 있는 것들이 생겼다. 그동안 배우던 것들도 이제 스킬이 많이 올라서 꽤 괜찮은 실력이 되었다. 내가 누군가를 돕거나, 혹은 동등히 서로 좋은 일을 제안할 수 있을 때.. 아, 이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구나!라는 생각이 확 드는 때가 있다. 무엇보다 그런 생각이 들면 불안함이 많이 사라진다. 스스로를 믿게 된다. 내가 말하는 궤도는 돈을 많이 번다거나 내 객관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가고 싶은 방향성이 내가 재밌어하는 방향성과 일치한 걸 의미한다.


재밌느냐 건 내년엔 이 궤도를 깨보려 한다는 거다. 바닥부터 어느 정도 안정권에 오르는 과정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물론 더 세밀하고 촘촘한 궤도가, 아직 내가 오를 자리가 아주 많을 테다. 나야 아주 새끼 기획자고,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은 수없이 많으니까. 근데 한 군데서 뾰족한 정상보다는, 이것저것 융합하며 내가 정의하는 길을 걷는 게 나인걸 뭐 어쩌겠나. 그 방법으로 이 궤도에 오를 수 있었던 거기도 하다. 이제는 성질대로 살 생각이다.


버킷리스트를 쓰는 계획형은 아니지만, 이제는 인생계획을 조금 촘촘히 세우고 피드백할 요량이다. 아카이빙과 기록의 힘, 긍정과 확언의 힘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하는 게 워낙 많고, 이 콘텐츠들이 아까우니까 정리가 필요하긴 한데.. 후 또 처음엔 엄청 헤매겠지.


앞으로 30대에 어떤 걸 해보고 싶냐면.. 뭐 현실 다 빼고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하자면 노르웨이 3년, 하와이 3년, 뉴욕에서 2년을 살아보고 싶다. 심지어 이들 중에서 어떤 곳에서는 미술학 석사과정을 밟아보고 싶다. 딸 하나, 아들 하나 낳아서 외국 시골에서 날것 그 자체로 애들을 키우며  또 육아과정을 콘텐츠 삼아 웹으로 브랜딩 해보고 싶다. 또 타투를 배워 타투 기술자가 되고 싶다. 아, 체중도 줄여서 유지하고 싶고, 무엇보다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하고 싶다.


내가 브랜딩 하고 총괄하는 사업을 시작하고 싶고, 심지어 잘하고 싶다. 큰 규모의 있는 물건을 수출하는 업이면 좋겠고, 벌이도 훌륭하고, 브랜드 가치도 훌륭한 것을 만들고 싶다. 경제적 측면이 지금은 너무 약한데.. 돈을 버는 법을 좀 그 과정에서 배웠으면 한다. 그림으로는.. 해마다 개인전을 하고 매번 다양한 형태의 기획이 들어가면 좋겠다. 작가로서 명성도 쌓고, 갤러리나 딜러가 붙으면 좋겠다. 그리고 책을 3년에 한 권씩은 내고 싶다. 30대에는 총 3권. 무엇보다 글을 자주 쓰는 내가 되면 좋겠다. 그래서 이 과정들이 전부 기록되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30대에 하고 싶은 건 이 정도.. 10년 뒤에 이 글을 보며 다시 한번 피드백을 해봐야겠다. 실제로 어쩌고 있을지 궁금하다. 살다 보면 하고 싶은 게 훨씬 많아질 거고, 비교도 못하게 다양하고 풍요로운 삶의 소스들을 즐기고 있을 테다. 20대도 그랬으니까. 그때 잘 쌓아 올린 걸로 내가 무난하게 30대를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


사람은 상상력만 무한하고, 본인에 대한 믿음이 있고, 부지런하기만 하다면 뭐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상상력이 있어야 더 큰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것 같다. 내 주변에 큰 상상력을 갖춘 사람들만 가득하기를 바라본다. 서로 자극이 되고, 도움이 되는 커뮤니티가 꾸준히 이어지기를. 무엇보다.. 더 큰 세계를 만나려면 영어공부를 좀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모든 것은 가장 적당한 때에 가장 좋은 형태로 내게 올 거다. 내가 종교는 없지만 이 한 줄은 정말 잘 믿는다. 실제로 원하는 게 되게 금방 금방 나타나는 편이기도 하고, 다양한 제안들이 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아직 때가 아닌 것들은 그저 원하고 기다리면 된다. 내 자리에서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할 수 있는 것들에 충실하면서. 오늘은 쉬는 날이니까, 집중해서 푹 쉬고 놀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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