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약 Jan 25. 2024

가까운 어른이 돌아가셨다.

바로 지금이자, 오늘이자, 이 순간

가까운 어른이 돌아가셨다. 아프시다는건 들었는데, 1년만에 이렇게 빠르게 가실줄은 몰랐다. 누구나 가면 여운을 남기지만, 어릴때 나를 많이 봐주셨던 우리 작은 할머니였다. 돌이켜보니 다행이 옷은 몇 번 사서 선물해 드렸는데, 역시나 아쉬운게 있다. 우리 친할머니랑 둘이 같이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같은 동네 사는 작은 할머니에게도 내가 여럿 탈 수 있는 차로 바꾸면 꼭 같이 나들이가자 했는데. 나는 엊그제차를 바꿨는데, 작은 할머니는 가시고 말았다. 딱 한번만 같이 소풍갔다 가시지.. 그럼 내가 이렇게 아쉽지 않았을텐데.


생과 사는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다. 가까운 누군가 저 세상을 갈때마다 난 생각한다. 다음은 절대로 없구나. 모든건 오늘, 지금, 당장만 있구나. 아끼는 사람들에게 많이 표현하고, 연락해야지. 보고 싶다, 밥 한번 사게 해주라. 고 말해봐야지. 제일 보고 싶었던 친구에게 아침부터 연락해서 말했다. 보고 싶다고, 축하하고 싶다고,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제일 먹고 싶은거 골라서 시간되면 말해주라고. 그 친구도 날 보고싶어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다음은 없으니 오늘을 살자.


마음은 빈도라고 생각한다. 나는 비싼 레스토랑 한 번보다 까페에서 10번 만나는게 좋다. 뭘 먹냐 뭘 하냐 보다 같이 어떤 얘기를 나누냐, 어떤 가치관을 공유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표현하지 않는다면, 상대가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안다. 누군가 나와 너무 친해지고 싶었다는데, 내가 전혀 몰랐던 적도 많았으니까. 커피 한 잔 같이 하지 않아봤는데 뭘 어떻게 알겠어 내가.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평생 많이 표현하고 살려고 한다. 다시는 못 만나도 아쉽지 않게, 항상 표현의 그릇이 찰랑 넘치게.


훨씬 더 오래 곁에 있을줄 알았던 사람이 떠나면 당연히 언제나 아쉽다. 괜히 못했던 것도 생각나고, 더 잘할걸 싶기도 하고. 우리가 죽음으로 배울 수 있는 건 단 하나다. 언제나 죽은 사람만 불쌍하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며 그러니까 살아있을때 잘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지금이자, 오늘이자, 이 순간이다. 죽은 사람에게 의견을 건넬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알기론 단 하나도 없으니까. 미운 사람에겐 아쉬운게 없다. 적어도 애증이여야 아쉬운게 있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쉬운 것 만큼의 비극이 있을까.


최근에 내가 친구에게 넌 너무 사람관리를 안해, 했더니 친구는 연말인사는 내가 먼저 했다며 억울해했다. 미안하지만 연말 인사를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 보고 싶다는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막상 봐야 소용이지. 날을 잡고 시간을 맞추는 구체적 행위가 없다면 다 뜬구름일 뿐이다. 가끔은 이 뜬구름이 좋다. 언젠가 봐요, 시간나면 봐요. 하면서 언제 시간이 되는지 절대 묻지 않는 것이다. 상대가 잡으려 하면 굳이 의향이 있지 않더라도 맞춰 나가기도 한다. 적어도 서로 알 기회를 한 번은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판단은 그 다음에 하더라도.


그니까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을 지금 당장 만나야 한다. 가까운 사람이 떠나면 그때서야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뭐 얼마나 바쁘고 얼마나 잘나게 살길래 그간 연락 몇 번 더 못했는지. 도대체 뭘 얼마나 잘나게 살길래... 오늘도 별 잘나지도 못하게 사는 나는 바쁘고 잘나서 연락 못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난 항상 현전성을 생각한다. 가신분이야 어쩔수 없고, 이런 경험으로 하나라도 더 나은 선택들을 해야지. 곁에 있는 사람에게 지금, 오늘, 당장 잘 해야지 하면서.


그러니까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을 한없이 찰랑거리며 살자. 
























매거진의 이전글 아주 조금의 용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