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관객이 되던 날
평소에 공연을 꽤 좋아한다. 연말에는 수없이 많이 다녔는데 연초가 되니까 거의 사라져서 마침 아쉬웠는데, 성악가인 친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내일 우리 합창단에서 문화의 날을 맞이해서 오픈 리허설을 하는데, 태교에 좋은 곡들이 있다고, 놀러오지 않겠냐고. 마침 시간도 되고, 생각이 깊은 친구라 그 친구가 추천해주는 무대는 왠만하면 다 가는 편이라 냉큼 간다고 했다.
저녁쯤 연락이 왔다. 그런데 이번에 신청한 사람이 너 하나래. 혼자 공연을 본다니, 뭔가 웃기기도 하고 특별하기도 해서, 나때문에 다 고생하는게 아니라면 간다고 했다. 그래도 평소 10명쯤은 왔다니까, 사실은 당일에는 사람이 오거나 혹은 없으면 어느정도 지인들이 채워줄 줄 알았다. 나 지각대마왕인데, 어쨌든 지각하면 절대 안되겠네? 그럼 네가 시간 잘못 알려줬다고 해야지. 장난치며 대화는 끝났다.
다음날 시간 맞춰 현장에 도착했다. 지금 생각하면 뭐라도 하나 사가지고 갈껄. 너무 급하게 연락받기도 했고, 오전공연이라 편하게 갔다. 갔더니 친구가 맞이했고, 곧 다른 합창단에 근무하는 지인들도 나왔다. 진짜 오늘 관객이 1명인 모양이였다. 오늘 1명 온다는건 다 알았는데, 그게 약씨였어요? 다른 지인들이 반가워했다. 이전 축제 프로젝트가 끝나고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였다. 곧 단무장님이 나와 맞이해주셨다. 고상하고 우아한 자태였다. 이전에 내가 잘 따르는 작가님께서 친하다고 들어서 인사도 하고, 작은 스몰토크도 했다.
시간이되어 입장하는데, 단실에 의자가 단 하나 놓여있었다. 내자리였다. 민망해하며 들어가니 족히 30명은 되보이는 합창단이 웃으며 맞이해줬다. 앗, 이렇게 밝은 공간인지는 몰랐는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오픈 리허설이라길래, 그냥 리허설하는걸 살짝 구경하는 그런 자리인줄 알았는데, 공연도 하고 해설도 하고, 유쾌한 지휘자님이 대화도 거시는 그런 자리였다. 뭔가 부끄러워서 합창단 쪽은 잘 쳐다보지 않았다.
친구가 곧 출산을 앞뒀다고 미리 말해뒀나보다. 지금 임신 7개월인데, 아직 밖에서는 다들 모를 정도로 배가 나오지 않았다. 내 몸에 맞게 직접 옷을 만들어입기에 옷이 편하고 핏이 좋아 지금도 짧은 치마에 부츠를 즐겨 신는다. 그날도 코트, 블라우스, 치마 모두 내 몸에 맞게 직접 만든 옷들이였다. 나중에 들으니 그 친구는 배가 이렇게 나와있을줄 알았다고.. 응, 사실 나도 지금쯤은 그래야 할 줄 알았어.
그래서 곧 출산하신다면서요? 하면서 지휘자님이 물어보시길레 네- 하는데, 30명의 의문스러운 시선이 날아와 꽃힌다. 7개월이라고 밝히면 늘 받던 시선이지만, 자리가 자리인만큼 조금 더 민망하다. 원래 늘 당당하고 시크한 편인데, 내가 너무 민망해하는게 너무 웃겼다고 한다. 아.. 네 :) 출산 예정일도 물어보시기에 답하고, 좋은 노래들의 해설도 받았다. 관객 한 명만 있어도 여러명이 모두 최선을 다해주는 모습이 고마웠고, 특별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은 기운을 주는데, 꼭 사랑받는 아이를 낳아야지 싶었다.
사실 지인들이 있기 전부터 합창단 연주회는 혼자 잘 다니던 편이였다. 그냥 아무도 몰래 혼자 가서 혼자 와서 그렇지, 원체 공연보는걸 좋아하기도 하고 클래식과 성악을 듣는걸 아주 좋아한다. 오페라도 하고 합주도 하고 다양한 형태로 공연을 진행하던건 알았다. 평소에도 가곡을 틀고 작업하기도 한다.
가곡은 시가 노래가 된 형태로 가사가 아주 예뻐서 너무 매력적이다. 예를들면 최근에 같이 미디어아트작업한 '마중'이라는 곡에는 '사는게 무언지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라는 가사가 있다. 난 이 가사를 듣고 그렇게 설렜다. 아니, 내가 먼저 가서 꽃으로 서있겠다니. 그건 어떤 마음일까. 세상에 가곡은 아주 많고, 늘 잘 모르는 노래가 있다. 그래서 공연을 가면 좋은 노래들을 체크해서 또 듣고 하는 식이다.
이 날의 연주에는 '봄 바람 난 년들, 나 하나 꽃 피어, Little man in a hurry' 곡이 나왔다. '봄 바람 난 년들'은 '매화꽃'이 나오는걸 봐서는 섬진강 어디인것 같은데, 전라도 사투리가 구수하게 들어간 곡이였다. 되게 재밌는 노래가사였다. '나하나 꽃 피어'는 가사가 굉장히 서정적이다. 난 이런 서정적인 가사들이 좋다. 나 하나 꽃을 피우고 너도 꽃 피우면 결국 온 세상 풀밭이 꽃밭 되는거다. 꼭 들어보시길. 'Little man in a hurry' 은 노래는 굉장히 신나는데 내용은 또 가볍지많은 않은게 매력이랍니다.
30분 정도 진행된 연주가 끝나고 나왔다. 조금 민망하긴했지만 꽤나 재밌고 특별한 추억이 되었다. 만약 내가 '나 혼자라고? 그럼 안갈래.' 했으면 없었을 추억. 이런 소소하고도 특별한 추억들이 쌓여 인생이 특별해지는게 아닐까. 노래를 하고, 반주를 친다는건 꽤 멋있는 일이다. 관객이 있는 현전성 있는 공연을 하는게, 반응이 바로 보이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게, 그림을 그리는 나는 난 늘 부럽다. 그래서 항상 같이 작업하고 싶어하지.
후에 친구에게 '약아, 난 네 자신감이 멋있어'라고 연락이 왔다. 나야 하루 가고 말지만, 사실은 직장에서 혼자서 날 초대해준 그 친구의 자신감이 훨씬 더 멋있었다. 내게 특별한 경험을 선물해줘서 고맙기도 했고. 또 다음에 만나면 웃으며 꺼낼 추억이 쌓였구나 싶다. 이렇게 쌓여서 안주거리가 많아지는거고, 대화가 재밌어지는거지 뭘. 내 생에 이런 경험이 얼마나 더 있을 수 있겠어. 나중에 하트에게도 여러번 들려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