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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Apr 08. 2020

카페에서 대형 화분을 깼다.

기분 상한 날의 박약독백

 더는 미룰 수 없는 업무에 몇 달만의 문화기획자들과의 미팅을 잡았다. 만나기로 한 카페는 세련된 인테리어로 꽤나 트렌디했다. 우린 지역 관광상품을 소포장하기 적합한 테이블에 앉아 소포장을 하며 기획회의를 했다. 한창 소포장을 하던 와중 팀원 중의 한 명이 의자에서 일어섰고, 의자 바로 뒤에 위치하던 대형 화분의 중 한 화분이 와장창 깨졌다. 


 분위는 사색이 되었고, 프린터에서 달려 나온 직원들은 치우면서 화분 값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치우고 나서 얘기하자는 팀원의 말에, 화분을 다 치우고 나서 두 직원과 한 팀원이 자리에 앉아 화분 값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실내는 조용했고 바로 뒷 테이블에 앉았기에 내용은 명확히 들렸고, 멀리 앉아있던 커플도 아닌 척 집중했을 것이다. 마침 하이에나처럼 글감을 찾던 나는 더 집중했다. 


 두 명의 직원과 한 명의 팀원의 협상은 격렬했다. 직원들의 입장은 어른들도 몇 번 앉았으나 아무도 화분을 깬 적이 없었으며, 그렇다면 애초에 화분이 가까운 걸 알면서 앉은 사람의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앉기 전에는 가깝다 말다 말을 안 했지만 앉아 깨트리고 난 후에 그런 말을 한다는 게 비상식적이며 누가 봐도 이 상황은 팀원이 잘못했다 판단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팀원의 입장은 본인이 손을 휘두르거나 가장자리에 있는 화분을 깼다며 당연히 변상을 할 것이며, 지금은 그냥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났는데 의자에 닿아 화분이 깨졌으니 본인 과실로만 판단하기에만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5만 원으로 제시했던 화분 값은 3만 원으로 책정되어 변상되었다. 


 중요한 건 화분이 깨졌던 말던간에 같이 온 팀원들이 전부 감정이 상했다는 것이었다. 모든 협상은 뒤에 사람이 있다. 손손이 내려온 명문 도자기도 아니고, 화분이야 살면서 깰 수도 있고 몇만 원쯤이야 변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그 과정이 중요했다. 사장으로 추정되는 젊은 남자는 나오는 표정부터 화가 나 있었고, 말하면서도 손을 벌벌 떨었다. 아마 사업도 초창기이며, 아직 이러한 갈등사항을 아직 많이 겪지 못한 듯이 보였다. 또한 가족사업인 것 같았는데, 어떤 갈등 상황이든 간에 원 테이블에서 정면에서 보이는 곳에서 두 명이 한 명과 번갈아가며 입씨름을 한다는 게 보기 좋아 보이진 않았다. 


 만약 우리 측에서 넘어진 화분 때문에 크게 다쳤더라면 어떻게 나왔을까. 혹은 혈기왕성한 이십 대가 아니라 어린아이가 그랬다면? 부모는 절대 이렇게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주장하는 대로 문제가 되지 않는 구조라면, 앞으로 배치도 절대 바꾸면 안 될 것이다. 그 논리라면 사고 선례가 없는 안전규정이란 필요가 없는 일이다. 화분 값을 받고 싶었으면, 그냥 죄송한데 받아야겠다 정도만 얘기해도 됐다. 애초에 손님 탓이다, 이렇게 판단하는 게 비상식적인 것이다는 뉘앙스를 풍기니 감정이 상한 것이다. 


 '장사하는 법을 모르네'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다친 곳은 없었냐는 소리를 먼저 들었다면 기분이 좀 풀렸을까. 죄송해요, 어떡하죠..라는 내 첫마디에 '치워야죠 뭐 어떡해요'라는 대답이 아니었다면 더 나았을까. 원인에 대한 논의를 꺼내려는 팀원에게 '중요한 건 비용이죠.' 라면서 잘라먹기를 하는 말투가 맘에 들지 않았을까. 비용을 지불하고 앞으로 다른 말을 하지 않겠다는 서류를 쓰자고 제시한 것도 꽤나 불쾌했다. 중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었다. 단지 어떤 카페에서 실수로 화분을 넘어트려 깨트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취급이라니.. 눈 앞의 3만 원, 5만 원을 두고 이렇게 다섯 명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고? 아무래도 마이너스다. 


 우린 불쾌했고 기가 빨려 카페에서 나와 잠깐 이야기하다 각자 흩어졌다. 겉으로 화려하게 보이진 않을지 몰라도 우린 이작은 소도시에서 지역의 매개자들이었다. 매개자들의 무서운 점은, 매개자들과 친하다는 것이다. 문화권력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사회를 위한 일정 행위를 지속하는 사람들의 말을 조금 더 신뢰하기 마련이다. 나오기 전 의자와 화분의 거리가 보이는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왔는데, 이 사진들은 바로 공유되었다. 우리는 몇 달에 한 번 만날 정도로 생활권이 겹치지 않고, 이 좁은 지역에서는 별게 다 이슈가 된다. 분명 내일이 되면 그 카페의 주소와 함께 온갖 단톡 방을 돌 일이었다. 


 사람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이다. 감정의 무서운 점은, 몇 바퀴를 돌면 주관적인 말이 나간다는 것이다. 과연 일이 년 뒤에 내가 이 근처를 방문해서 '아 그때 이쪽 카페에 왔었는데...'로 운을 띄운다면 그때 객관적인 상황을 설명하며 얘기할 수 있을까? 절대 없다. 분명 넘어트렸던 의자의 색도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 기억날 것이고, 난 분명 내가 기분 나빠할 만한 상황이었다는 것만 변호할 것이다. 


 큰 일도 아니긴 하지만 지역 카페에 올리거나 sns에 불쾌감을 공유할 생각은 없다. 만일 있었더라면 이 밑에 찍은 사진을 추가했을 것이고, 지역민이 보면 알 정도의 특징을 붙여 적었을 것이다. 누군가 열심히 준비한 사업장이 순간의 판단 미스로 저평가되는 게 내 탓이 되기는 싫을뿐더러, 이렇게 단순한 갈등의 처리가 미숙한 사업장이 고평가 받기는 어차피 힘들다. 굳이 내 숟가락을 얹지 않아도 된다.


 모든 갈등에는 사람이 있다. 사회에는 위에도 아래에도 뒤에도 앞에도 사람이 있다. 모바일에서 외치는 화려한 가치에 비해 수많은 사람들이 종종 잊는 것 같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지 않더라도 실외에서 2m 내에 사람이 다가올 일이 없는 이 지역에도 사람이 있다. 정말 중요한 건,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하면서도 사람 간의 관계를 망치지 않는 일이다. 문제야 어차피 의도치 않게 생긴다. 


 다친 곳은 없냐며 다정하게 물어봐 주었더라면, 본인들의 과실도 인정해주었다면 분명 미안해 더 자주 들렸을 것이다. 우리는 문화기획자다. 몇십 명이 오는 행사들은 카페 대관을 해서 진행되는 경우도 잦다. 물론 음료값은 따로, 대관비는 따로 책정된다. 이 작은 도시에서 청년 몇십 명이 재밌는 추억과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가는 장소는 세련된 이미지 구축에서도 인증샷 면에서도 좋은 홍보가 되었을 수 있다. 물론 그 카페에서 이런 걸 원치 않았을 수도 있지만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좋은 관계 구축은 다양한 가능성이 확장될 수 있다는 예시이다.


멀리 보지 못하는 그 청년 사업가가 안타까웠다. 그렇게 예쁜 인테리어를 하려면 큰돈이 들었을 테다. 웅장한 하드웨어 속에 여물지 못한 소프트웨어라니. 서로의 태도를 이상하다 못 느끼고 오히려 거드는 그 그룹의 시야가 참 좁았다. 5명이 동시에 불쾌함을 내비쳤는데, 그럼에도 상황판단을 못하는, 심지어 사업을 하는 리더라니. 원인은 깨진 화분이었지만, 우리는 상대가 비치는 태도에 상처 입었다. 장사하는 법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당황스러웠다. 물론 협상이 끝나고 우린 바로 까페를 나섰고, 오랜만에 반갑게 만난 미팅은 허무하게도 끝이 났다. 다들  당분간 그쪽 카페, 모두를 쳐다도 보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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