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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Mar 29. 2020

안온한 일상

새벽 4시께에 깨어 삶에 감사하는 박약독백

 나는 종교가 없다. 하지만 매 순간 삶에 감사한다. 아침마다 마주하는 초록의 풍경들은 나를 설레게 만든다. 일어나면 화장실에 갔다가 옷을 벗고 무게를 재고, 비타민과 물을 한 잔 마시고 하루를 시작한다. 다이어트 중이지만 무게와 지방의 비율은 소폭 왔다갔다거릴뿐, 사실 꽤나 오래 큰 차이가 없다. 그럼 뭐 어떤가, 매일 체크하는 것에 의의를 둔다.


 코로나 덕에 수영장이 휴업을 했다. 평소 6시 20분에는 나갔어야 했는데 이젠 7시에 산책을 나서도 충분하다. 밀린 공부를 하던지, 글을 쓰던지, 책을 읽던지.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으로, 나는 아침이 집중이 제일 잘 된다. 30분쯤 무언가 학습을 한다. 2주에 한 번씩 도서관에 가서 10권씩 빌려오기 때문에 늘 읽을 재밌는 책들은 많다. 이제 브런치를 시작했으니 글을 쓰는 시간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는 사주와 타로 시험이 있어서 생기는 시간마다 인강을 듣느라 야단이었다.


 운동복을 챙겨 입고 러닝화를 신고 마지막으로 마스크를 끼고 에어팟을 챙기면 좋아하는 노래들을 들으며 산책을 시작한다. 또 아령은 깜박 잊고 두고 나왔다. 왠지 손이 헛헛하다. 봄이 오는지 풀보다 꽃들이 먼저 폈다. 저 꽃들을 날 잡아 취재해야 하는데, 아직 활짝 핀 게 아니라 왠지 애매하다. 해랑 나랑 서로 간을 보고 있다. 곧 초록 초록해질 대지를 바라보며, 왠지 설렌다. 이 아름다운 자연과 산책길 때문에 나는 여기로 왔다.


 사회적 거리 두리가 한창 유행이라지만, 이 작은 마을에서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거리가 두어지곤 한다. 아직 코로나 청정 지역인데 그냥 살다 보면 왜 청정지역인지 알 수 있다. 오늘도 한 시간을 걸으며 마주친 사람은 세네 명. 조금 더 늦게 나오면 열 명. 추운 겨울엔 한 두 명이었는데 날씨가 좋아지긴 했나 보다. 그래도 모두가 마스크를 칼같이 챙겨 쓰고 있다.


 오른쪽에는 바다를 끼고, 왼쪽에는 풀들을 끼고 걷는 조성된 둘레길을 걷는 기분은 꽤나 좋다. 답답한 도심의 보도블록과는 사뭇 다른 흙내음과 풀내음이 난다. 산길에는 밟히는 게 나무뿌리다. 반복되는 장애물들은 내 생명력을 높여줄 것이다. 한참 걷다 보면 그 어떤 고민들도 별게 아닌 게 된다. 왠지 스스로가 사랑스러워 보이고 자랑스러워 보이고,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 풍경을 몇 컷 찍어 지인들 단톡 방에 좋은 아침이라며 보낸다. 그들에겐 똑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어떻게 매일 바뀌는 초록을 자랑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어요. 반복으로 자유로움을 만나는 산책시간이 난 하루 중에 가장 좋다.


 풀은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자연 속에서 일 년을 살다 보면 소나무의 새순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풀이 얼마나 빠르게 자라는지, 꽃들의 원색이 얼마나 진한지 알게 된다. 햇살을 주기적으로 맡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고마운 일인지도 알게 된다.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삶이 휘청거리고 할 수 있는 것들의 폭이 바뀐다. 세상은 너무 발전해서, 20대 여자애가 혼자 자연에 살면서도 할 수 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아름다운 풍경에서 흙을 밟으며 살면서 소프트웨어적으로 원하는 것은 모두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세상인가. 하루하루가 경이롭고,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오지의 시골에서 혼자 꽁꽁 사는 것은 아니고, 그냥 조성이 잘 된 평범한 소도시에 살고 있다. 물론 도농복합도시기에 도심보다 농촌의 면적이 더 넓은 지역이고, 그 농촌에서도 내가 딱 점찍어둔 곳이 있다.  언젠가 오지의 시골에서 혼자 꽁꽁 사는 날이 올 테고, 그런 날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미래를 담보로 많은 것들을 비축하고 있다. 오지의 시골에서 꽁꽁 살 테다.


 이곳에서는 늘 자유롭다. 완벽한 타지에서 시작했기에 성인으로써 내가 설정한 모습들만 타인들을 볼 수 있다. 어떠한 기대도 없고 배경도 없고, 뭔가를 잘해야겠다는 압박도 없고. 지역에선 지인들의 카르텔이 강하다던데 그 카르텔이랑 만날 일도 없고 탐도 안 나고. 시기하는 사람도 없고 질투하는 사람도 없고. 매일 해를 마주하는 사람들은 그런 걸까, 어딜 가나 지평 성이 넓게 보여 하늘을 마주하며 사는 사람들은 여유로운 걸까.


 풍성한 초록을 걷고 있으면, 왠지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용한 자연을 사박사박 걸으면 내가 세상의 중심이란 생각이 든다. 수많은 사람의 인파에 휩쓸려, 의도치 않게 누군가를 터치하며 간신히 지하철 손잡이를 잡던 때엔 그러지 않았는데. 서울에서 단 몇 주간 출근을 하며, 우리나라에 이렇게 사람이 많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사람의 인파 속에서 나는 개미처럼 작아지곤 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스마트폰 액정을 보고 있었고, 그 액정도 고개만 돌리면 어떤 글씨가 쓰여있는지까지 읽히곤 했다. 삶의 기본권이 침해당하는 느낌이었다. 돈을 내고 타는 이동수단에서 내 자리마저 보존되지 않는 곳. 탈 때마다 안녕하세요와 내릴 때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눈을 마주치고 웃어주는 86번 미니버스 기사님이 절절히 보고 싶었다.


 아침 산책이 끝나면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 차에 오른다. 널찍한 자동차 전용도로에 올라 두세 번만 신호등을 받으면 일터에 도착한다. 출근길 평균 시속이 80대라니. 이곳에서는 유난히 칼라풀한 소형 자동차가 많이 보인다. 차가 없으면 출퇴근할 수 없는 곳이 태반이고 우리 예술촌도 그렇다. 나보다 일찍 온 직원들의 차들이 보인다. 9시 출근시간에 2-3분 일찍 주차하기에 종종거리며 사무실로 들어가 인사하고 시답잖은 일상을 나누고, 차를 한 잔 타서 청광안경을 끼고 자리에 앉으면 업무 시작이다.


  업무가 끝나고는 친구들과 카페를 가서 작당한 일들을 하거나, 수다를 떨거나 데이트를 하곤 했었는데 요즘은 바로 집이다. 아무래도 모임들은 모두 파했다. 집에 와서 인강을 듣고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지루하면 카페에 가던지 한다. 사실 공간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약속이 없으면 혼자 가서 혼자 할 일을 한다. 그 할 일이란 그림 그리기, 공부하기, 책 읽기, 글쓰기, 카톡으로 시시덕거리기 정도가 태반이다. 조금 자세히 밝히자면 요즘 간단한 컷툰을 욕심내고 있고 월마다 내야 하는 기삿거리가 있다. 브런치도 최근 작가가 되어 자주 쓸 예정이고 가끔 영상편집 같은 게 있을 때가 있다. 신작이 나오면 영화도 꼬박꼬박 보고 최근에는 수채화와 일러스트 쪽, 캘리그래피 자격증을 땄다. 곧 프랑스 자수도 자격증을 딸 예정이니 인강을 듣고 작품 3개를 만들어서 보내야 한다. 브런치용과 일러스트용 sns를 요즘 신설해서 관리도 진행해야 한다. 친구들과 진행하는 비영리단체 사업을 따기도 하고 운영하기도 한다. 혼자 있어도 유희 거리가 참 많은 21세기다.


 주변에서 많이들 부지런하다고 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게, 무언가를 하기에 방해 요소가 전혀 없다.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에 마주치는 사람이 많아 기가 빨리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출퇴근 시간도 짧다. 반려동물을 키우며 시간을 함께 보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연애도 안정기라 손 갈 것도 없고. 원체 손으로 뭔가를 하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어차피 나가서 할 것이 별로 없기도 하고. 직업상 바쁠 땐 바쁘고 한가할 때엔 한가해 주 5일 학원을 다닐 수도 없고, 학원도 별로 없을뿐더러.. 집은 넓고 pc부터 아이패드, 많은 미술용품까지 무언가를 하기에 웬만한 물건들은 구축되어 있다. 오히려 시간은 남아서 탈이다. 술을 안 먹는 게 아니라 마실 일이 별로 없는 곳. 안 꾸미는 게 아니라 꾸밀 일이 별로 없는 곳. 이 곳의 매력은 허무함과 심심함, 그 안온함을 온전히 자기 계발로 채우는 재미이다.


  배가 고프면 저녁을 먹기도 하는데 요즘은 워낙 예술촌에서 간식을 잘 챙겨 먹어서 데이트가 없으면 저녁을 따로 먹지 않는다. 이런저런 일들을 하다 10시면 눈이 슬슬 감긴다. 그러면 전기장판을 데워 잠들고, 알람 없이 새벽에 일어나 같은 사이클을 반복한다.


 나만 생각하고 사는 이러한 안온한 일상이 평생이 반복돼도 좋겠지만, 나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에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을 안다. 길어야 몇 년이나 남았을까. 조용하고 차분한 새벽녘의 공기를 마시며 혼자 작업에 몰두할 수 있을 기간이. 그때는 그때 나름의 새로운 유희와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매 순간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이때가 매우 그리울 것 같다. 그래서 더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행복하다. 해보고 싶은 것들을 선택해서 하는 것이 마치 카페에 혼자 도착해서 오늘은 아메리카노를 마실까, 카페라테를 마실까란 고민처럼 가볍고 자연스럽다. 오로지 나만 생각하면 된다.


 매일이 즐겁고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 나는 앞으로도 나를 방해하는 환경에서 도망칠 것이다. 사람의 의지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고 환경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기회만 된다면 아예 시골로 들어가려 한다. 예쁜 집을 꾸며 초록 속에 살고 싶다. 4계절은 질리지 않는 액자가 되어줄 것이다. 나는 더 자유로워지고 솔직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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