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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Aug 09. 2021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고 느낀 점

아주 약간의 스포를 곁들여서

플로리다 프로젝트, 이름만 수없이 들었던 이 영화를 드디어 봤다. 로맨틱한 색감과 드넓은 풍경에서 자라는 빈민촌 아이들의 삶. 초반에는 아이들이 너무 짓궂어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전체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가슴에 서늘한 여운이 들었다. 영화를 보고 다양한 평론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정성일 평론가 님의 평론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같은 영화를 보고 이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구나, 싶었다. 누군가는 또 나처럼 일반인의 시각이 궁금할 수 있으니 오늘은 이 영화를 보고 든 생각들을 적어보려 한다.


비록 모텔에서 살지만, 아이들에게는 드넓은 자유가 느껴졌다. 넓은 대지를 마음껏 뛰어다니고 햇살을 실컷 받고 아지트를 만들고 동네에 관해 속속들이 알고 원할 때는 질주하는 삶. 물론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책임지지 않기도 하지만 6살의 아이가 단지 재미를 위해 이렇게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였다니, 놀랐다. 어른들에게도 당당하고 할 말 다 하는 꼬마 아이는 방법이야 어쨌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노력하고 실제 성취해서 나눠먹는다.


몰라서 그렇지, 우리 주변에도 무니 같은 아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나마 미국은 아동인권이 높아 환경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이를 위탁가정에 인도한다. 사랑하는 엄마인 헬리와 헤어지는 게 새드엔딩으로 보여도, 장기적으로 보면 해피엔딩일 수 도 있다. 헬리는 무니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객관적으로 키울 환경이 되지 않는다. 금전적으로도 그렇지만, 심적으로는 더 그렇다. 무니는 어른들의 욕을 달고 살고, 남의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훼손한다. 헬리는 무니 앞에서 욕과 우기기도 서슴없이 한다. 헬리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위탁가정으로 가는 게 둘 모두를 위한 길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헬리와 무니가 있었다면, 두 번째 기회가 있었을까? 아마도 무니가 성인이 되어 집을 나가지 않는 이상, 함께 했을 것이다. 사실 일반적으로 빈곤층의 삶을 알기가 어렵다. 가난이 터부시되기도 하고 보통 지역별로 나고 자라기에 크게 느낄 수 없다. 특히 나는 대도시가 아닌 지역에서 나고 자라서 주변도 거의 비슷하기도 했다. 최근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빈곤층으로 살다가 성인인 된 사람의 글과 동감하는 댓글들을 자세히 읽어봤는데, "21세기에 한국에 이런 곳이 있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 글은 두 가지를 메시지를 드러냈다. 부모에 대한 분노와 짠함의 양가감정, 빈곤에 무지한 일반인들에 대한 부러움. 이를 악물고 성공하거나 혹은 스스로 먹고살 수 있게 된 자식들은 가족을 완전히 떠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빈곤하다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다만 한번 빈곤하면 더 빈곤하기 쉬운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 참 안타깝다. 아파트 구매가 힘든 사람은 전세를 살게 되고, 전세에 살기 힘든 사람들은 월세를 살게 된다. 비용으로 따지면 월세는 가장 큰 부담이 된다. 비단 집뿐일까, 헬리는 어리고 충분한 사회적 매너를 익히지 못했으며 더 어린 딸이 있다. 더 어린 딸은 헬리를 보고 배운다. 헬리의 잘못들을 따뜻하게 제지하는 사람은 없다. 건물 관리 주인 바비는 그나마 헬리를 신경 쓴다. 하지만 헬리는 아빠처럼 굴지 말라며 분노한다. 이런 태도로 헬리는 자꾸만 관계를 잃고, 기회를 잃는다. 사회적 약자들이 장기 거주하는 모텔을 관리하는 바비에게 분명 이러한 갈등은 처음이 아닐 것이다.


빵을 나눠주는 차와 아이를 인도하러 온 아동국 직원들처럼 사회의 도움도 나타나 있다. 헬리에게 전부인 무니를 데려간다면 남은 헬리는 어떻게 될까. 무니는 이 악순환을 끊고 성인이 되어 자립할 수 있을까. 마지막에 눈물을 쏟아내는 무니를 보며 감동이 요동쳤다. 아직 아이일 뿐인데, 무니에게는 전부인 엄마를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안타까웠다. 평소 앞만 보고 달리느라 생각하지 못했던, 내 뒤를 돌아본 느낌이랄까. 누군가 조금만 더 신경 쓰면 헬리와 무니에게는 다른 삶이 펼쳐질 수도 있는데. 그 누가 내가 될 수는 없을까? 평소 관심 있었던 교육봉사를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기로 했다.


위탁가정이라는 낯선 개념도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는 꽤나 까다롭다고 했다. 당연히 조건이 까다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탁가정을 거쳐 입양된 아이들은 사회성 발달이 더욱 되어 적응을 더 잘한다고 했다. 육아 경험이 있고, 막내가 초등학생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나중에 내가 육아도 해보고,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있다면 해보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트리거란 책에서 내가 세상에 3명의 사람의 삶을 바꾸고, 그 3명이 또 각 3명의 삶을 바꾸는 게 반복된다면 세상 전체가 바뀔 것이라고 했다. 그런 세상을 조금 기대해봐도 되지 않을까.


무니의 눈물이 잊히지가 않는다. 괜한 여운으로 자꾸만 가슴 한편이 서늘해진다. 본인들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을 조금 더 올바른 방향으로 교정하는 것이 비단 관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민간에서 사람과 사람 간의 관심과 배려가 많아지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아주 짜증날만 한 상황에서도 영화 속 어른들은 보호하는 어른들에게만 말하지 아이들을 크게 혼내지 않는다. 이런 문화적 차이가 신기하기도, 부럽기도 했다. 앞으로 나도 아이들에게 조금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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