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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Aug 20. 2021

영화 <소공녀>를 보고 느낀 점

뾰족한 취향에 관하여

영화 소공녀를 보고 여운이 깊게 남는다. 보통의 가난은 취향을 뺐는다. 물론 미소보다는 여윳돈이 많지만, 어쨌든 현재 백수이자 취향으로 일상을 점철해 살아가는 내가 공감하지 않기는 어려웠다. 미소가 고집스럽게 지켜나가는 취향이란 무엇일까. 만약 내가 미소와 같은 상황이라면 현실적으로는 일단 짐을 싸들고 지방으로 내려와 젊으니까, 무슨 일이라도 하면서 저렴한 월세를 살 것 같다. 하지만 위스키와 담배는 끊지 않았을 것이다. 포기라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는 기본 옵션이 있는 사람도 있다.

미소의 취향에 동감했던 부분은, 나도 당장 돈이 없고 잘 집도 간당간당하더라도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볼 것이다. 실제로 전주에서 실제로는 되게 돈 없던 인턴 생활에도 도서관에 꼬박꼬박 가서 책을 여러 권씩 빌려보고는 했다. 혼자 돈 만원에 울면서도 존심 때문에 가족에게 손 벌 리지도 않고, 반찬은 사지 않더라도 친구들과 술은 꼬박꼬박 사 먹던 날들이었다. 밖에서는 아마 몰랐겠지만.

두 번째는 그림이다. 실제로는 개인 작업시간이 굉장히 짧은 편인데, 그냥 떠올리기만 해도 즐거워지는 장르이다. 관련 이야기를 하고, 뭔가 찾아보고 하는 과정 자체가 즐겁다. 좋아하는 영화와 글쓰기도 어쨌든 독서에서 파생된 것이고 사진 한 장을 찍거나 간단한 결정을 하더라도 어쨌든 미술에서 흘러나온 미적 감각은 깔려있다. 책과 미술, 이 두 개가 없는 박약은 어딘가 허공이 아닐까.

취향에 대해 생각이 길어진다. 독립해 살면서도 장을 본지가 오래되었다. 오늘 아침에도 배고프다는 생각에 그냥 밥에 간장을 비벼먹었고, '어떤 몸매를 좋아해?'라는 단체톡의 단순한 질문에 열 줄이 넘는 답을 하면서도 '어떤 거 먹고 싶어?'라고 하면 '아무거나'라는 대답이 태반이다. 아침에 입을 옷을 고르고 하루 종일 지닐 물건을 고르는데도 사실 일이 분이면 충분하다. 대부분의 결정은 직감적으로 고른다.

나는 어느 지역에 살던, 이 주에 한 번씩 혼자 도서관에 가서 한 시간 정도 책을 고른다. 신권 코너를 먼저 돌고, 관심 있는 책은 들어보고 펴보고 조금 읽어본다. 큰 글자 코너도 한 번 돌고 평소 읽어보고 싶었던 책들이 있으면 그 코너를 전부 살펴본다. 하나하나 꼭 들어서 문체를 봐야 한다. 난 이 시간을 제일 좋아한다. 굳이 방해할 사람도 없지만 누군가 방해한다면 분명 도끼눈이 될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미싱 클래스에서는 원단부터 디자인까지 꼭 손수 고른 것으로 해야 한다. 내가 준비하지 않고 그냥 가는 일은 절대 없다. 미술 레슨 받을 때도 내가 그릴 수 없든 말든 내가 원하는 사진으로 그려야 한다. 미술 수업을 할 때도 무조건 내가 원하는 커리큘럼으로 해야 한다. 다행히 창작에 관한 수업들은 모두 고집스러운 취향을 장려한다. 내 취향은 쏠려있다. 일상적인 선택은 굉장히 단순하고, 직감적이지만 내가 만드는 것에 대한 선택은 정말 징그럽게 까다롭다.

남자 친구랑 드라이브를 갈 때 꼭 책을 골라가는데, 보면 꼭 입을 옷을 고르는 시간보다 어떤 책을 두어 권 가져가야 하는지 고르는데 시간이 더 걸린다. 무조건 장소와 기분에 맞는 책을 읽고 싶다. 카페를 그렇게 자주 가면서도 어디로 갈지는 기분에 따라 그냥 고르고 메뉴는 웬만하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통일한다. 하지만 거기서 뭘 할지는 새벽 운동 내내 고민한다. 차 트렁크에는 항상 내가 하는 모든 활동의 준비물이 실려있다.

모르긴 몰라도 미소의 담배와 위스키도 그런 존재일 것이다. 물론 나보다는 훨씬 기호가 세지만 나는 많이 동감하면서 봤다. 그리고 이런 기호가 없는 사람들의 삶도 궁금하다. 어쨌든 스스로를 책임지고 이 지구에서 숨 쉬며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현실적인 게 아닐까? 뾰족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이유는 언제나 궁금하다. 그러니까, 미소야 다른 데 가지 말고 우리 집에 살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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