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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Sep 06. 2021

비운의 약짜르트 사건

그때 피아노를 안 사줘서 그래

한국에서 노래 못 부르며 살기가 어마나 어려운지 아는가. 나는 미술도, 아침운동도 한지 10년 차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친해지는 과정에서 함께 그림을 그릴 일은 도무지 없다. 딱히 운동 동아리가 아니라면 웬만하면 함께 땀을 뺄 일도 없다. 그런데 노래방은 얼마나 자주 가는지. 대학생 때에는 이성에게 줄 수 있는 매력과도 비례했다. 살면서 느낀 건데 우리나라에서 노래 못 부르는 사람은 정말, 정말로 희귀하다.


슈스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은 어찌나 지속적으로 인기 있는지, 미술 생방송 프로그램이 없는 게 한스런 지경이다. 내가 음악만 잘했더라면, 음미체라는 예체능이 모두 완성되었을 텐데. 왜 다룰 수 있는 악기도 하나 없단 말인가. 지금에서야 바이올린을 시작해서 배우고 있지만, 악보를 보지 못해 그것도 자꾸만 처진다. 하지만 나는 음악을 못한다는 것에 대한 완벽한 핑곗거리가 있다.


아주 어릴 때 외할머니께서 피아노를 사라며 돈을 주셨다. 이모네들은 다 근사한 피아노를 샀는데, 우리 집은 당시 친가 쪽에서 사려던 밭이 있어 돈을 보태 밭을 샀다. 나한텐 물어보지도 않고.. 왜 나를 위해 준 돈인데 본인들의 밭을 샀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원통하다. 결국 이모네들의 딸들은 모두 피아노를 칠 줄 알고, 나는 모른다. 환경이 어찌나 중요한지 외가 여자 애중에 나만 피아노를 치지 못한다.


당연히 나만 악보를 보지 못하고, 나만 음감이 없다. 심지어 난 박치이기까지 하다. 내가 어릴 때 피아노를 사서 뚱땅거렸다면 이는 다 해결되었을 일이다. 밭의 가격은 크게 올랐고, 심지어 그 밭은 내 명의로 되어있지도 않다. 외가에서는 오히려 잘 된 것 아니냐고 하지만, 이모들은 다 피아노를 사줬으니, 친척동생들은 다 피아노를 칠 줄 알게 되었으니 이러한 슬픔을 모른다. 이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누가 밭 가지고 싶대? 피아노를 잘 치고 싶댔지. 이미 지나간 일이니 일단 그 밭은 내 것이라 친가 외가에 심심하면 이 비운의 약짜르트 사건을 귀에 인이 박히게 말하고 다닌다. 아니 밭을 팔아서 돈이 생기면 피아노로 캐논을 칠 수 있나? 이 비교는 적합하지 않다. 혹시 아나? 내가 약짜르트가 될 수도 있었을지. 어렸을 때 아파트의 또래 언니들은 다 집에 피아노가 있었고 멋지게 칠 줄 알았는데 나만 못 쳤다.


사실 선천적으로 음악적 기질이 없었던 것은 맞다. 7살에 보낸 피아노 학원에서는 애가 선생님만 떠나면 진도대로 치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1곡만 반복해서 친다고 전화가 왔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바이올린을 2년간 배웠으나 악보를 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에 옆집 언니에게 과외를 받기도 했다. 노래는 피아노고 뭐고 간에 잘하는 애들은 원래 잘한다.


그럼에도 나는 자꾸만 과거의 기회가 욕심이 난다. 나는 목소리가 성숙하다. 다들 내가 무슨 말도 하지 않았는데 노래 실력을 기대한다. 내가 노래방에서 첫 노래를 부르면 묘하게 변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친구들과 콘서트를 운영하는데 음악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드로잉으로만 참여한다. 이런 경험이 쌓일 때마다 나는 자꾸만 그때의 피아노가 아쉽다.


부모님은 이 사건을 별로 미안해하지도 않고, 내가 시골로 이사와 농사짓고 살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 밭의 소유권에 대해서 별로 관심도 없다. 넌 어차피 음악을 못하니까, 그냥 하나의 에피소드라 생각하는가 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음악을 못할 때마다 자꾸만 그때 피아노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 그 돈은 우리 외할머니의 마음이었는데, 홀랑 밭을 사다니. 아예 집이 가난해 생활비로 썼으면 이해라도 될 텐데. 사지도 못한 피아노가 어른거린다.   


결국 29살이 돼서 내 시간과 돈을 투자해 바이올린을 다시 배운다. 당연히 9살에 악기를 칠 줄 아는 것과 29살에 악기를 칠 줄 아는 것은 완벽하게 다르다. 처음에는 재밌었는데, 캐논을 연습하면서 악보를 못 읽고 박자감이 없어서 자꾸 진도가 안 나간다. 그때 피아노가 없어서 남들이 달리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래도 이번엔 꼭 음악을 꾸준히 배워서 나중엔 이렇게 말해야지. 비운의 약짜르트 사건이 있었는데, 스스로 극복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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