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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Sep 23. 2021

약속의 무게

합의와 약속의 차이

사람마다 약속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기획일을 하며 꼼꼼히 기록하고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된 나와 흘러가는 대로, 매사에 만족하며 사는 내 남자 친구의 약속의 무게는 아주 다르다. 일단 약속의 정의부터 다른데, 흘러가는 말에 서로 합의가 되었다면 나는 약속이라 보고, 그는 그냥 합의라고 본다. 합의가 되자마자 나는 다이어리에 일정을 기록하는데, 그는 이러한 행태에 아주 기겁을 한다.


하기로 한 일은 하늘이 두 쪽나도 꼭 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나와,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말을 달고 사는 그. 우리는 웃기게도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함께 수많은 의사결정을 내리곤 했다. 사실 그 같은 스타일을 살면서 처음 봤는데, 그도 마찬가지라고 하니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처음에 소개를 받은 사이라서 잘 만나고 있는 거지, 친구사이가 먼저였다면 결코 친해지지 못했을 것이라 늘 말하곤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성미가 급하고 성격이 확실하다는데, 외국에서 살면서 느낀다는 당혹스러움이 바로 이것일까? 언제나 천하태평한 그에게 언제나 놀라움과 일종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남들이 약속에 늦으면서 연락이 안돼도 그냥 늦는가 보다 하고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을 꺼내 보며 기다리며 마실 커피를 사 오는 그. 6시에 오기로 한 메일이 6시 1분이 돼도 오지 않으면 바로 전화를 하는 나와는 확연히 다르다.


빽빽한 일정에 24시간 다이어리를 끼고 사는 나와 달리 약속은 감으로 기억하고, 까먹다 전날에 알더라도 딱히 스케줄을 잡아놓지 않고 살기에 약속 이행에 문제가 없는 그의 삶은 아주 다르다. 우린 서로 누구에게 처지는 것 하나 없이 아주 잘 살고 있으며, 누가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도 없다. 우리는 둘 다 다른 방향으로 현재의 삶을 행복해하고 각자의 인간관계를 만족해하고 있으며, 어쨌든 시간을 헤쳐 잘 나아가고 있다.  


항상 바쁘고 열심히 사느라 달리기만 하던 나는 그에게 여유를 배웠다. 하루를 통으로 비우고 절과 자연에서 산책하는 것만 여유가 아니었다. 작은 것에도 만족하는 법, 남들을 더욱 유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하며 흘리는 것도 모두 여유였다. 그에게 스며들며 목메던 많은 약속들을 내려놓고 빈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내게 빈 공간들은 불안이었는데, 이제는 가능성이 되었다. 


사람마다 다른 약속의 무게. 내가 잡은 모든 약속들을 꼭 지켜야 할까? 우린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물질을 보고 신기한 사람들을 보고 수많은 약속을 한다. 그런 약속들이 이행되는 게 발전이라 생각했는데, 이젠 그게 맞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애써 약속을 많이 잡지 않더라도 내게 필요한 일은 딱 그만큼 내게 오곤 하더라. 그 덕에 내 약속의 무게가 꽤나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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