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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도빈 Jun 17. 2024

애월의 둘째 날

애월의 둘째 날


애월의 둘째 날이 밝았고, 여름과 함께한 첫밤이 갔다.

호텔 조식을 먹기 위해 우리는 3층 연회장에 앉았다. 아침은 왕처럼, 저녁은 거지처럼 먹어야 한다고,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꼭 그래서 아니지만 나는 정말 왕이라도 된 것처럼 접시를 수북이 채웠다. 여름이 접시를 들고 내 옆에 앉았다.

-정팔 씨, 접시가 빈틈없네요. 뱃속에 거지라도 들었나요?

-뷔페라서 그런 건 아니고, 평소 아침을 이렇게 먹습니다. 할아버지 말씀에 따라서요.


윤여름은 왼손잡이다. 그러므로 날 때부터 오른손잡이인 나와 그녀가 동시에 수저를 든다면 서로의 팔꿈치가 닿아 불편해질 것이다. 나는 마치 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왼손으로 포크를 들어 방울토마토를 집었다.


-침대에서 주무시지 그랬어요 정팔 씨. 바닥 불편하지 않았어요?

이 말의 진의는 무엇인가.

그랬다. 나는 어젯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침대에 오르려 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시도하기 전에 분명 여름이 그랬다.

-정팔 씨는 밑에서 잘 거죠? 그럼 잘 자요

하여, 나는 “그럼요 저는 바닥이 편해요”라고 말하고 불을 끄고 누웠다. 잠이 올리 없겠지. 여름과 나는 어둠 속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늦도록 깨어 있었다.

-어제 분명히 여름씨가 바닥에서 자라고, 선을 딱 그으시길래, 원하는 대로, 여름씨 편히 주무시라고, 그래 아직 때가 아닌가 보다 하고, 사실 저도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서…

여름이 풉, 하고 조용히 웃었다.

-정팔 씨 바보는 아니죠?

이 말의 진의는 또 무어란 말인가. 할아버지는 이런 말도 하셨다. 거지가 될지언정 바보로 살지는 말라고.

-저기, 저는 바보는 되지 말래서 바보는 아닌데요. 그렇다고 뭐 거지도 아니긴 하지만...

-바보가 아니라면, 연애가 처음이에요?

또 진의를 묻다가 가슴이 쿵쾅 거렸다. 연애! 연애? 지금 연애를 하고 있다, 뭐 그런 뜻인가. 우리가 그걸 하고 있다. 나는 용기를 조금 내어본다.

-그럼 오늘 밤엔 술이라도 한 잔 하죠. 연애하는 사람들끼리

여름은 가타부타 대꾸 없이, 또 풉, 거렸다.


-정팔 씨, 어제 제 얘기 듣기 좀 거북했어요? 저도 아무 한 테나 속 얘기, 옳은 얘기 막 하고 그런 여자 아닌데, 정팔 씨가 편한가 봐요

정팔 씨가 편하고 정팔이는 연애가 처음인데 또 바보는 아니고. 이래저래 가슴은 더 콩닥거린다. 아무튼 그녀가 내게 이야기하고 있다.

-예전에 선영이랑 피자집에 갔어요. 페퍼로니 씬 도우로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았죠. 선영이가, 올해 트윈스 팀이 선두를 달리고 있는데, 매년 이러다 순위가 주욱 미끄러졌었다고. 그런데 올해는 다를 거라고, 느낌이 좋다고, 두고 보라며 야구 얘기를 시끄럽게 늘어놓길래, 저는 듣는 척 딴생각을 좀 했어요. 사실 저는 야구를 썩 좋아하지 않거든요. 뭐랄까 스포츠 같지 않다 랄까. 운동하는 사람이 허리에 벨트 하잖아요. 상의도 그래요 재킷 같은 걸 입잖아요. 게다가 단추가 달린 것으로. 뭔가 너무 편해 보인 다랄까. 숨이 차는 느낌이 없어요. 정팔 씨는 야구 좋아해요?

나는 사실 다음 주 잠실 경기를 예매해 놓았다. 베테랑 선수의 은퇴 투어고, 심지어 테이블석이다. 환불규정에 따라 취소 위약금이 발생할지 모르겠다. 물론 윤여름과 갈 생각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그러다가 선영이 머리 위로 커다란 메뉴판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걸 읽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막 억울한 거예요. 아니 왜, 도우가 얇은 피자가 두꺼운 피자랑 같은 값인 거죠? 페퍼로니 피자, 두꺼운 도우 18,000원, 얇은 것도 18,000원. 정말 황당하거든요

-여름씨가 돈을 더 지불했다는 건가요?

-아뇨, 아뇨, 더 냈다는 게 아니라 똑같았다고요. 양이 적잖아요, 양이. 그럼 십원 한 장이라도 덜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뭐 가게 방침인가 보죠…

무심코 뱉은 말이었다. 여름의 얼굴이 굳어졌다.

-방침이라… 그렇네요, 방침.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밥이나 먹죠"


나는 다시 심장이 쿵쾅거릴 것 같았다. 물론 아까와는 다른 의미에서. 만회해야 한다. 정팔아, 용기를 내! 공감해 보라고!

-그러니까 제 말은… 방침이지만… 고객입장에서 잘못된 방침은 방침이 아닌 것이죠.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죠. 고객은 늘 옳다. 아, 생각해 보니 사실 저도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었어요. 우리 사회 비합리적 단상이랄까. 돼지갈빗집에서 느꼈어요. 메뉴에 1인분이 180그램인데, 뼈는, 뼈 무게는 빼고 계산해야 맞지 않나 싶더라고요. 뼈라는 게 매번 그 크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살만 무게를 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사실 이건 피자보다 더 불합리한 거죠. 그렇죠 여름씨? 여름씨는 따뜻한 도회지 여자니까 동감하죠?


나는 팔짱을 끼고 허리를 세웠다.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도록 하자.

-어쩜 정팔 씨. 제가 아까 바보 아니냐고 한 말 취소할게요. 제가 어디까지 했죠? 아, 거기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주방도 보였는데, 아마도 사장이 쓴 걸로 추정되는 종이가 벽에 붙어 있더라고요. ‘한가할 때 틈틈이 정리정돈!’ 이렇게요. 자, 이제 정팔 씨 차례인가요?”


여름이 그렇다 하니 그런 거겠지. 나는 내 차례가 되었기에, 팔짱을 풀고 주먹을 조금 쥐어 보였다.

-참나, 웃음밖에 안 나오네. 한가할 땐 쉬어야지. 쉬는 시간엔 쉬어야지. 정리정돈은 쉬는 게 아닌데. 게다가 틈틈이 하란 말이냐. 거기다 느낌표까지! 정말이지 촌스럽기가 그지없네요

여름이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끗 보더니, 왼팔을 슬쩍 들었다. 나는 그녀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을까, 나도 모르게 고개를 오른쪽은 기울였다. 손은 내 어깨를 짚었다.


-어쩜, 정말이지 틈틈이 괜찮은 정팔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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