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이야기

by 최도빈

<뻔한 이야기>


누런 양은 냄비 들썩들썩. 뜨겁고 하얀 숨을 푹푹, 내뱉는다. 동그라미 너구리, 쪼갤까 말까. 손에 힘 주어, 뚝, 라면을 사선으로 자른다. 툭, 다시마는 던져진다. 벌건 스프를 탁탁, 물색의 물, 금새 너구리 빛으로, 부글부글, 가열차게 끓어 오른다. 김치로 추정되는 용기를, 품위있게, 들꽃이 그려진 접시에 덜고. 곧 완성할 한 끼 식사. 귓바퀴를 닮은 손잡이 잡아 당겨 밥상에 올리자. 앗! 뜨거워. 손이 따가워. 현기증이 일어. 아차차, 그만 냄비를 엎어 버린다. 오호 통재라. 이제 몰고 갈 너구리 더 남아 있지 않은데. 여기 쓰린 속 무엇으로 달랠꼬.


최도빈 시인의 <울지마, 도빈>에서 가져왔다.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그의 시를 맛보고 있자니 내 속도 밥을 달라고 가열차게 울어댔다. 나는 고시원 공동 주방에서 공동 냄비에 물을 받아 공동 가스렌지에 올렸다. 이제 물이 끓으면 너구리를 넣으면 될테다.


띵똥! ‘나 합격했어 오빠’ 그녀의 메시지다.


나는 하려던 모든 행위를 중지하고 302호 나의 집으로 올라갔다. 집이라 봐야 길이 100센티미터 짜리 책상 하나와 폭 80센티미터 침대, 그리고 작은 옷장으로 꽉찬 방이다. 나는 침상에 누워 못다끓인 너구리를 떠 올렸다. 그러자 그녀도 떠 올랐다. 속이 아프다. 속이 나쁘다. 속이 시끄럽다. 베개 밑에서 휴대전화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곧 부재중 전화가 될 그녀의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 보다가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초 여름 한낮의 뜨거운 공기가 희뿌연 연기 되어 내 가슴속으로 훅, 들어왔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 그녀는 며칠 전과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마치 스타카토를 뿌려 놓은 것처럼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하여 나도 스타카토를 온 몸으로 맞아드리며 반갑게 인사했다. 잘 지냈어?


그녀는, 영숙 언니가 수석 합격이라니 말이 되느냐, 자기도 찍은 거 한 문제만 더 맞았어도 차석은 했을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무원 초봉은 너무 박한 거 아니냐, 곧 출퇴근 하려면 차를 사야 하는데(오빠에게 사달라는 말은 아니다), 운전연수가 꼭 필요하냐, 그래도 고사는 지내야 되냐, 뭐 그런 자기의 말을 했다.

그러면서, 둘째 이모가 선 자리 주선했는데 한사코 거절 했다고, 사귀는 사람 있다 분명히 말했다고, 그런데 엄마가, 이모 체면 생각해서, 성의를 봐서라도, 다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니까, 얼굴은 비추고 와야 하지 않겠냐고,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지 아냐고, 자꾸만 자꾸만 말씀하셔서, 그래서 엄마랑 이모 입장도 있고, 또 자식된 도리로, 진짜 딱 한 번 얼굴만 비추고 오겠다고, 츄리닝에 화장도 안하고 갈 거라고, 신라호텔 망고 빙수 언제 먹어 보겠냐고, 중요한 문제이기에 오빠랑 상의 한다고, 뭐 그런 그녀의 말도 했다.

또 그러면서, 그래도 신림동 전봇대 아래에서 오빠와 나누었던 쌍쌍바는 절대 잊지 못할 거라고, 합격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음음, 목을 가다듬고, 스타카토의 힘을 빌어 나도 나의 말을 했다.

그럼, 자식된 도리 해야지. 너희 어머니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모 입장도 있고 하니까. 망고 빙수 먹고 싶어 했잖아. 나는 괜찮아. 나야 내년에 다시 시험 치면 되지 뭐. 7급으로 준비 하라고? 허허, 꿈은 크게 가져야 한다고? 그럼 그럼, 나는 괜찮아. 여기 고시원 총무가 그만둔대. 이 참에 총무나 해볼까 봐. 돈도 벌면서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으냐.

또 이런 말도 했다. 참, 너 작년에 합격한 민식이 형 알지? 너 면접 봐야 하잖아. 내가 형한테 족보 좀 구해다 줄까? 어? 이미 만났어? 그래 그래, 나는 괜찮아.

그리고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헤어지자는 거냐고?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아무튼 축하한다고. 너 합격한 거 축하한다고. 늦었지만 이 말 꼭 하고 싶었어. 만나서 얘기 하자고? 안되겠는데, 나 지금 홍천이야. 힘드냐고? 아니 아니 아버지 생신이라 내려 온 거야. 여보세요? 전화가 왜 이러지 산이 막혔나 안들려, 끊어야 겠어.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옥상 평상에 벌러덩 누워 남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뜨거운 공기가 담배연기와 함께 가슴 속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 나는 편의점 알바를 마치고 고시원으로 돌아와 저녁으로 편의점 점장이 챙겨준, 아니 폐기해 준 강호동 도시락을 먹었다. 302호 침상에 누웠다. 베개 아래 휴대전화가 울었다. ‘네? 여길 오셨다구요?’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 입고 머리를 빗고 고시원 1층으로 현관으로 갔다. ‘청춘 고시원’이라 적힌 촌스러운 입간판 옆으로 아버지가 계셨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서울에 일이 있어 왔다가 들렀다. 식사는 아직이지? 밥이나 먹자꾸나


부자는 고시원에서 두 블록 떨어진 ‘이모네 가정식’에 들었다. 불고기 백반과 맥주 두병을 주문했다.


-서울에 잔치가 있었어. 정삼이 아저씨 알지? 거 왜 키만 멀대같이 큰 놈 있잖아. 그 집 맡 딸이 시집갔거든. 너랑 고등학교 동창이지? 이름이 순심이 였나, 아무튼 네가 걔 좋아하지 않았냐. 어려서 그렇게 인물이 없더니 오늘 보니 아주 예쁘 더구나.


-순심이 아니고 순정이에요 아버지. 그리고 제가 아니고 걔가 날 좋다고 좇아 다녔죠. 그럼 뭐해요.


아버지는 남은 맥주를 모두 들이켜고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시골땅 팔기로 했다. 아들아, 홍천으로 내려와라. 땅 판 돈으로 작은 식당이라도 해보자. 서울은 말이야, 밥이 맛 없다.


302호 침상에 앉아 까스 활명수를 마셨다. 거북했던 속이, 나빴던 속이, 시끄러웠던 속이 좀 편해지려나. 베개 아래 휴대전화가 울렸다. 엄마의 메시지다.


-네 아부지 소화제 한 다스 드셨다. 그래도 불편하대서 바늘로 손을 몇 방 찔러줬다. 피가 얼마나 검던지. 뭔 잔치 가서 밥 드신 양반이. 아들 밥 안먹었다고 또 드시니. 탈이 안나고 베겨 탈이. 내가 정말 못산다 니 아부지 때문에.


나도 답장을,

-그럼 아부지도 저녁을 두 번 먹은 거에요? 거참. 나도 지금 소화 안돼 죽겠어요 엄마. 나도 손 좀 따줘요. 그리고 생각해 봤는데 아부지 말이 맞아요. 신림동은요, 다 좋은데요, 밥맛이 없어요 밥맛이.


차마 이렇게 하지는 못했고, 다음과 같이 했다.


‘엄마, 저는 괜찮아요. 다음 주 아부지 생신에 홍천 내려 갈게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All I want for christm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