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잡부라는 말을 알아요? 이제 팀장님도 그렇게 되어야 해요.”
외근을 간다며 나가던 H가 갑자기 이런다.
‘스타트업 잡부라니, 무슨 의미지?’
아침에 출근했더니 커다란 택배 박스가 사무실에 도착해 있었다. 며칠 전 H는 선반으로 된 수납장이 필요하다며 온라인몰에서 구매했다.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이미 사무실 한 구석에는 똑같은 택배 박스가 있었으니, 지금은 총 두 개의 택배 박스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H는 ‘스타트업 잡부’라는 신조어가 재미있었는지 혼자 낄낄 거리다가, 나에게 자기가 외근하는 동안에 수납장을 조립해 놓으라고 하고 나가는 것이다. H가 내게 스타트업 잡부가 되라는 소리를 할 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나 혼자 저걸 다 조립해 놓으라고?’
혼자서 180센티미터의 철제 선반장 두 개를 낑낑 거리며 조립할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둘이 힘을 합쳐서 하면 될 텐데, 이걸 혼자 하라고?’
H는 왜 내가 혼자서 그 일을 하는 게 당연하게 여겼는지 의문이 들었다.
‘설마 지금 그냥 농담을 하고 나간 건가?’
창업 초기의 스타트업은 자금, 인력, 네트워크의 측면에서 기존 회사들에 비해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열악하다. 비즈니스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투자금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고, 오로지 기술적인 혁신에만 기대어 회사를 일으킨 스타트업이라면 당연하다.
사실 하나의 기업, 브랜드, 서비스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세부적인 업무들을 프로페셔널하게 처리해줄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스타트업이 그렇게 조직을 세분화하여 전문성이 있는 팀들로 세팅하기 까지는 몇 년이 걸린다.
스타트업이 자금이 충분하지 않다 보니, 괜찮은 인재를 구하는 건 스타트업의 인사담당자에게는 늘 어려운 미션이 되곤 한다. 결국 어느 정도 회사가 성장할 때까지 회사에 몇 명 없는 직원들은 일당백으로 필수적인 업무를 맡아서 할 수밖에 없다. 초창기의 스타트업들은 아직까지는 회사의 면모를 갖추는 데에 있어선 모든 면에서 걸음마를 막 뗀 아기 수준의 회사이다. 그런 곳에서 일을 하다 보니, 직원들은 거의 모든 일들을 ‘맨 땅에 헤딩’ 하는 수준으로 해낸다. 스타트업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여러 경험담을 들어보면 거의가 대동소이하다.
그러다 보면, 주로 개발자를 제외한 기획, 운영, 마케팅, CS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사업을 운영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로 하는 잡다한 업무들까지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사회적인 혁신에 관심이 있고, 열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잡다한 일들을 전부 맡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직원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그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황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잡부’라는 말은 직원들이 일당백으로 회사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일들을 혼자서 처리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빗대어 말하는 자조적인 단어이다. 이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내가 할 일이 아닌데, 어쩌다 보니 내가 처리하고 있네?’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자신을 스타트업 잡부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내가 이러려고 입사했나?’, ‘나의 전문성은 어디로 갔지?’, ‘왜 나만 계속 야근을 해야 하지?’ 등의 짠내 나는 생각들을 다 해봤을 거라 추측한다. 그런 생각을 안 했다면, 자신을 그런 식으로 호칭하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스타트업의 대표가 직원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것도 입사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사람한테 말이다. 나는 H의 태도에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스타트업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일하는 초창기 직원들은 회사의 창립 이전부터 이미 서로를 아는 관계이거나 아주 초기부터 합류해서 함께 어려움을 넘겨온 피도 눈물도 함께 나눈 동지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그러하듯, 다양한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만남의 이야기의 결과는 항상 같을 수 없다. 스타트업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의 관계가 이상적으로만 흘러가진 않는다.
사실 상 스타트업에 입사했다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일이나 사람과 맞지 않거나, 회사가 투자 유치에 실패해서 망해 버려서, 업종을 전환해서 등의 이유로 퇴사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창업한 기업 중에 3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 시장에 남아 있는 확률이 결코 높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초기 기업에서 일한다는 것은 사업의 대표이든 직원이든 커리어의 위험을 감수하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작은 조직일수록 더욱더 진실한 대화를 통해서 상대방의 협력과 양해를 구해야 한다.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직원들의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 주고 좀 더 인간적으로 대하려고 노력하는 게 맞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들도 하기 싫은 게 당연하다. ‘상대방을 존중할 때, 당신도 존중받을 수 있다’는 아주 간단한 인생의 이치가 직장에서 통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다른 조직에서 리더의 역할을 했을 땐, 팀원들에게 일을 맡길 때 늘 조심했다. 나는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도 그냥 막 이 일, 저 일 시키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불필요한 의사 결정의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가능하다면 팀원들의 의견을 물어보는 편이었다. 예를 들면, '지금 하고 있는 일 외에 또 다른 일을 받을 수 있는지’와 같은 질문들이다.
어쩌면 팀장이 그걸 팀원들에게 물어보는 게 더 불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팀원들로써는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그냥 팀장이 업무를 배분해서 알려주는 편이 따로 생각할 이유를 만들지 않으므로, 더 편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게 좋다. 답정너. 즉,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애초부터 나로 정해져 있다고 해도 나한테 의논을 하고, 그 일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여겨지는 게 좋다. 아무리 회사 일이라고 해도 그저 소처럼 끌려다니고 싶지 않다.
이 세상에 ‘배우는 과정을 거쳤음에도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란 거의 없다고 한다. 이전에 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고 해서, 우리가 평생 그 일을 못하는 건 아니다. 배우고 익히는 과정만 있으면, 누구나 대부분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에게 그 일을 해볼 만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입사할 때 담당하는 직무와 그에 대한 급여를 협의하고 일을 시작한다. 조직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에는 분명 필요한 직무에 대한 공고를 내고,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만나서 노동력과 시간에 대한 거래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 누군가 우리를 잡부 취급할 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한다. 입사하면서 맺은 근로 계약은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회사와 거래했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일을 할 때에는 일하는 나의 쓸모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나의 생산성의 가치와 보상에 대한 기대, 그리고 성장을 위한 목표를 갖고 시작한다. 내가 꾸준하게 일적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근무시간 동안에는 그 일을 집중적으로 하면서 성과를 내려고 애쓰고, 그로 인해 회사에서 급여를 받는 것이다.
내가 일을 할수록 더욱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것이고, 그로 인해 나의 가치는 입사하기 전보다 더욱 올라간다. 직원으로서는 회사의 성장이 나의 성장과 같이 갈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회사 역시 직원이 소진되어 버리지 않도록 성장을 도와야 한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내가 일하는 시간에 무조건 그 일까지 맡아서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사실 우리의 재능은 회사에서의 본 업무 외에도 무궁무진하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던 본캐, 부캐 이런 단어들이 알고 보면, 알고 보면 꽤 오래전부터 재능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개발자이면서 래퍼인 직원도 있었고, 그저 광고 카피라이터로만 알고 있던 사람이 알고 보니 에세이 분야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경우도 있었고, 온라인 마케팅 담당자로 알고 있던 사람이 가명으로 음악 관련 컬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기도 했다. 아예 유튜버로 활동 중인 것을 회사에 알리고 입사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회사에서 어떤 직원이 글을 잘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치자. 갑자기 본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다른 보상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이 일은 네가 잘하는 일이니 회사와 관련한 칼럼을 매주 쓰라’고 요구한다면, 과연 이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아니다. 그건 애초에 합의했던 근로 계약을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에 정당하지 않다.
우리가 가진 모든 재능을 도매가로 회사에 반드시 넘겨야 하는 의무는 없다.
오히려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회사나 사람이 과연 괜찮은 회사나 좋은 사람인지 의문이 든다.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이 결여된 무지함 역시 잘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