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작전타임’이라는 말을 쓸 일은 거의 없다. 운동경기라도 보지 않는 이상 말이다. 하지만 그 단어는 내게 묘하게 각인돼 있다.
아주 오래전, 내가 아들의 나이였을 때였다. 학교 체육대회에서 반 대항 배구경기가 열렸다. 여중생들이 수업 시간에 배운 배구를 종목으로 채택한 것이다. 반마다 키 큰 아이들을 중심으로 선수를 구성했고, 한 팀당 아홉 명쯤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규칙은 배구였지만, 연습이 부족한 우리에게 서브나 토스는 버거운 일이었다. 공만 제대로 넘겨도 점수를 따는 식의 경기였다.
우리 반 담임은 남자 영어 선생님이었는데, 반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편이었다. 반면 예선에서 맞붙은 옆 반의 담임은 여자 가정 선생님으로, 학생들에게 유난히 애정이 깊고 승부욕도 강했다. 그날 경기 심판은 수학 선생님이 맡았다. 체육 선생님들만으론 경기를 모두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기는 엉성하게 흘러갔다. 양쪽 모두 공을 겨우 넘기며 점수를 주고받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우리 반이 연달아 점수를 따내기라도 하면, 옆 반 담임은 빠르게 작전타임을 외쳤다. 우리 담임은 코트 근처에도 없었지만, 옆 반 담임은 수시로 등장했다.
결국 심판이던 수학 선생님이 참다 못해 외쳤다.
“선생님! 작전타임은 한 세트에 두 번뿐이에요! 지금 네 번 하셨어요!”
운동장 전체에 퍼진 그 목소리에 모두가 웃었다. 지금도 배구 경기를 보면 그날의 우스꽝스러운 작전타임이 떠올라 웃음이 번진다.
그런데, 요즘 내가 떠올리는 작전타임은 웃음이 아닌 전투모드의 신호다.
4일, 대통령 탄핵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믿었다. 주말 내내 안도하며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들에겐 작전타임이었나 보다. 말도 안 되는 속보가 쏟아지는 걸 보니, 우리가 너무 일찍 안심했음을 깨달았다. 방심했다.
개헌, 오픈라이머리, 거부하던 헌법재판관 임명 재개, 심지어 두 명의 신규 지명까지. 대통령 대행 체제, 두 달 후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는데도 임기 6년의 재판관을 지명하다니. 속보를 보는 내내 어이가 없었다.
이전 정권은 끝난 게 아니었다. 내란은 종식되지 않았다.
그들은 작전타임 동안 어떤 시나리오를 그렸던 걸까. 대통령은 물러났지만, 내란에 가담한 세력은 여전히 살아 있다.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자리를 지키며 상식적으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있다.
그들의 상식과 공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아는 상식과 공정을 가지고는 공직에 오를 수 없단 말인가. 그것이 우리 사회의 출세 기준이라면, 참담할 따름이다.
내란의 주체들을 공직 곳곳에 심으려는 알박기, 그것은 도대체 언제부터 기획된 일일까. 현실은 한순간도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까지 정치에 눈을 떼지 말아야 할까?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잠시쯤 한눈 팔아도 되는 걸까?
정치에 고관여자가 아니었던 나는 이제 피로하다. 하지만 다시 무관심의 상태로 돌아갈 수도 없다. 덕질하던 손끝이 이제는 뉴스를 스크롤하고, 응원하던 눈빛이 어느새 현실을 응시하고 있다. 사회가 안정되지 않으면, 내가 좋아하던 일조차 온전히 즐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정치와 사회를 향한 안테나를 세운다. 아무도 믿을 수 없기에.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아무 걱정 없이 덕질만 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