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신’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고무신의 줄임말로, 남자친구의 군복무 18개월을 기다리는 20대 여성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요즘은 이 단어가 아티스트를 덕질하는 팬들 사이에서도 자주 쓰인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티스트를 군에 보내고, 그의 전역을 기다리는 동안 “곰신 생활 몇 개월 남았다”라고 말하곤 한다.
작년 1월, 내가 덕질하는 리베란테의 김지훈이 입대했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시간이 어느덧 ‘내일’로 다가왔다. 팬들끼리는 “젊었을 땐 못 해본 곰신 생활을 나이 들어 덕질하며 해보네” 하며 까르르 웃기도 했다. 지나고 보면 너무나 짧은 순간들이지만, 지훈이 입대하던 당시 팬들은 “이 까마득한 시간을 어떻게 버티냐”, “내년 7월이 정말 오긴 오는 거냐”는 말들을 나누었다. 오지 않을 것 같던 그 시간이, 드디어 왔다.
그의 군 복무 기간 동안 여러 일이 있었지만, 결국 시간은 많은 것을 해결해 주었다. 실타래처럼 엉켜 도무지 풀릴 것 같지 않던 걱정들은 시간이 지나며 모두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그의 군 복무 동안 팬들은 그를 더 자주,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 시기 팬들 사이에서는 “아티스트를 군에 보냈더니 더 바빠졌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군 생활이 누군가에게는 멈춤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지훈을 통해 배웠다.
‘걱정’, ‘기우’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은 이제 뒤로 하고, 내일 그는 전역한다.
그의 전역은 팀의 안정과 도약을 의미하며, 리베란테가 세계적인 크로스오버 그룹으로 성장하리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하지만 그 기대와 함께 따라오는 감정은 허함이다. 더 잘되길 바라면서도, 너무 커져서 더는 손 닿지 않는, 잡을 수 없는 하늘의 구름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스타가 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만 알고 싶은 마음. 이 이중적인 감정은 어쩔 수 없다.
지난 금요일, 새싹 아티스트의 초대로 국방부 군악대대 정기연주회에 다녀왔다.
지훈의 전역을 불과 사흘 앞둔 시점이라 그는 무대에 서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새싹 아티스트 또한 병장이니 그럴 거라 여겼다. 그래서 솔직히 공연에 큰 기대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공연 소식을 직접 DM으로 전해주며 초대해줬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괴로웠던 일요일 밤, 그의 DM은 나를 구해냈다.
공연 초대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그에게 전할 선물을 준비했다.
유시민 작가의 책 ‘청춘의 독서’와 달달한 마카롱.
요즘 책을 읽으며 10분 독서 체크표를 책마다 붙여놓고 읽으며 체크하고 있다.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데 도움이 되어 선물하는 책에도 몇 개 살짝 붙여주었다. 그리고 입맛 까다로운 우리 집 녀석들이 엄지척하는 마카롱을 특별히 준비했다. 달달한 마카롱을 한입 베어 물었을 때, 부드러운 식감과 달콤함이 기분을 좋게 한다. 힘든 군 생활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준비한 선물에도 마음을 담았다. 인사치레용으로 급조한 아이템이 아니었다.
KBS홀에 도착해서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티켓을 받아들고 그를 기다렸다.
딸아이와 함께 있던 자판기 앞에서 그와 마주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초대해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그런데 티켓 나눠주는 분 누구에요? 명단에 이름이 없다며 자꾸 ‘다준이 가족이세요?’ 하고 물어보는 거에요. 그래서 다준씨랑 DM한거 보여주니 두 장 주더라구요.
-착오가 좀 있어나 보네요. 그래도 바로 받으셔서 다행이에요. 자리는 어디세요? 잘 보이는 곳이어야 할 텐데...
-작년엔 앞이어서 무대가 가까워 좋긴 했는데, 연주자들은 잘 안 보이더라구요. 이번엔 21열인데 괜찮을 것 같아요.
-저...말씀드릴 게 있어요.
-네? 뭔데요?
-저 방송 나가게 됐어요.
-어머~ 완전 잘 됐네요. 언제요?
-10월쯤 될 것 같아요.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어서 오늘 초대했어요.
-우와, 전역하고 바로네요. 제가 다 설레요. 무슨 프로그램이에요?
-Mnet에서 하는 밴드 결성 프로그램이요. 제의도 오고 고민하다가 결정했어요.
-아~ 예전에 슈퍼밴드랑 비슷한가 보다. 팀을 결성해서 참여해요? 아님 슈퍼밴드처럼 프로그램 진행하면서 거기서 팀이 결성되는 거에요?
-진행하면서 팀이 만들어질 것 같아요. 그동안 너무 감사해서 꼭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말하며 조심스레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20대 피아니스트의 손은 살림으로 거칠어진 내손보다 곱게 느껴졌다.
-너무 잘 됐어요. 열심히 응원할게요. 기회되면 다양하게 해보는거 좋은 것 같아요. 이것저것 다 해보세요. 우리 아들도 요즘 이것저것 찾아서 다 내보내고 있어요.
-아드님 나간 거 봤어요.
-우리 아들은 아직 갈길이 멀구요. 정말 잘 되면 좋겠어요. 잘 될거에요. 제가 찍은 사람들 다 잘 됐습니다.
-지훈이 형도요?
-그럼요! 정말 잘 될거에요! 아 근데 슈스되면 얼굴 보기 힘들겠다. 슈스되라고 응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제 보기 힘들어지네...하는 이 이중적인 맘 어떻하냐구요.
-그리고 이거, 선물이요.
-이렇게 또 받아도 되나요?
-그럼요. 연주회 초대해줬는데요. 이거 마카롱인데 혹시 단거 싫어하는거 아니죠?
-아뇨. 저 단거 엄청 좋아해요. 감사합니다.
-동네 맛집에서 사왔는데 사장님이 녹는다고 포장 엄청 꼼꼼히 해줬어요.
-지훈이 형도 줄까요?
-하나만 주세요. 이제 전역이니까 뭐…ㅎㅎ
그와 기분 좋은 대회를 마치고, 선물을 전달하고 그의 마지막 군 행사 기념 사진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티스트와의 추억은 소중하니까.
공연이 시작되기 전, 화장실에 다녀오니—두둥.
로비 쇼파에 김지훈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홀로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지훈님, 전역 축하해요. 저 립바미에요.(리베란테 팬덤명-립밤) 다준씨 초대로 오게 되었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와 쿨하게 인사하고 입장하려는데, 그의 좌석과 내 좌석이 아주 가까웠다.
지나가며 다시 말을 걸었다.
-작년 생카 향수 써보셨어요?
-아, 스틱형으로 바르는 거요? 네, 사용했어요.
그에게 살짝 눈인사를 하고 헤어져 자리에 앉아 공연에 초대해준 새싹아티스트에게 DM으로 사진을 보내주며 ‘자리가 너무 좋다. 무대 연주자들이 잘 보일 듯하다. 로비에서 지훈님을 만났다.’고 보내니 “대박”이라며 웃음 가득한 답을 보내왔다.
공연을 보다보니 이런 좋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나 이외의 팬들이 없는 곳에서 아티스트와의 자연스러운 만남은 모든 팬들이 꿈꾸는 기회 아닌가.
인터미션에 용기를 냈다. 두 좌석만 있는 곳에 앉아있던 그의 옆자리가 비었고 그는 홀로 앉아 있었다. 비어있는 옆자리에 은근슬쩍 앉으며
-지훈님 죄송한데 싸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그럼요.
항상 가방에 준비되어 있던 네임펜과 책을 그에게 내밀었다.
-성함이?
-네 저 홍00입니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 같아서 왔어요.
‘To. 00’으로 싸인을 하는 그를 보며
-싸인이 더 멋있어 진거 같아요. 혹시 저 기억하세요? 전기관에서 현수막 흔들고 했었는데...ㅎㅎ
-아. 네. 알죠.
정말 알아서 안다고 하는 대답 같지는 않았으나 그 대답이 나쁘지 않았다.
-저... 사진도 부탁드려도 되요?
-그럼요.
-어머, 정말요?
-제가 찍을까요?
그에게 핸드폰을 넘겨주고 그와 함께 셀카 두 장을 남겼다.
-공연 재밌게 보고 계세요?
-네. 초4 둘째랑 같이 왔는데, 오케 공연가면 맨날 졸다 인터미션에 일어났는데 오늘은 너무 재밌다면서 1부 졸지않고 잘 봤어요. 오늘 공연 너무 멋있어요. 전역하고 스케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는거죠?
-네. 기다려 주신만큼 열심히 해야죠. 많이 준비하고 있어요.
-지금 다들 엄청 흥분상태에요. 기대 많이 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서로 감사인사를 하고 그와 헤어졌다.
기대하지 않은 상황이 펼쳐졌으나 흥분된 마음과 달리 말은 너무도 차분하게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떨려서 제대로 대화가 안 되었을텐데, 그 순간 너무나 침착하게 그와 인터뷰를 한 느낌이었다.
이 자연스러운 만남을 덕친들에게 알리니 모두가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빨리 나노 단위로 이야기를 풀어 놓으라며 난리였다. 귀가 후에도 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무대 위의 아티스트만 보고와도 큰 감동에 휩싸이는데 대화라니. 정말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었다. 흥분된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밤 새싹 아티스트에게 감사의 DM을 보냈다. 덕분에 너무 좋은 시간을 보냈고, 인터미션엔 지훈의 싸인과 사진도 찍었노라고. 잘 될거라는 좋은 생각만 하며 전역하는 날까지 건강히 보내라고.
다음날 그의 답장은 준비한 선물에 대한 감사함이 담겨있었다. 선물에 담긴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면 기쁨은 배가 된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며 마음에 남은 건 지훈과의 대화보다 새싹 아티스트와의 대화였다. 좋은 소식을 직접 전해주고 싶어 초대 했다는 그의 말은 큰 감동으로 남아있다.
그동안 덕친들과 대화하며 농담으로 ‘마음이 식어가는 거 같아.’ 했는데 그 말이 진심이 된 듯하다.
내 마음의 원픽이 바뀌었다. 그동안은 리베란테 팀 내에서 원픽이 돌고 돌았는데 말이다.
새싹 아티스트가 전역하며 방송에 등장하면, 그에게 더 빠질 것 같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지만 지훈을 통해 알게 된 새싹 아티스트에게 더 마음이 갈 줄이야.
내 덕질의 종착지는 리베란테가 될 줄 알았는데...
리베란테의 김지훈이 전역했다. 그리고 그의 생일이다.
그의 전역과 생일로 서울 곳곳에 생카가 열렸다. 전역과 동시에 생카 투어를 하는 그를 보며 팬들은 축제 분위기다. 하지만 며칠 전 그와 대화했던 나에게는 이 들뜬 분위기조차 어쩐지 덤덤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