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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노동 제공, 그러나……. 팬은 언제나 약자

by Balbi


처음으로 불후의 명곡 녹화에 다녀왔다. 오래 걸릴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체력이 소모됐다. 그 과정에서 나는 ‘조금은 불합리하고, 방송사의 횡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방송사에서 방청객을 불러 모아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이 시스템이 정말 당연한 걸까? 아니면 내가 혼자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궁금했다.


덕친들은 말했다. “우리가 좋아서 가는 거잖아. 팬들은 아티스트 무대를 보고 싶어서 가는 거니까 약자일 수밖에 없어. 우리가 아니어도 방청하겠다는 사람은 줄 섰을 거야. 아쉬운 건 우리지, 방송국이 아니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제작자 입장에서는 팬들이 가진 감정을 이용해 프로그램을 거저 제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국의 시선과 팬의 현실

이 궁금증을 찾아보니 방송국은 ‘방청객을 관객이자 무대 연출의 일부’로 본다고 한다. 그래서 대가를 주는 개념이 아니라 ‘자발적 참여’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송 녹화는 리허설, 카메라 리허설, 무대 세팅, MC 멘트 재촬영, 무대 교체 등이 모두 포함돼서 실제 방송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방청객으로의 참여는 단순한 ‘관람’이 아니라 시간·교통비·체력 소모가 엄청난 활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TV 프로그램 방청은 관객이 시간을 투자해 프로그램 완성도를 높여주는 역할이니까 교통비나 사례비 지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한국 방송 환경에서는 여전히 ‘방청은 혜택’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내가 생각하는 교통비 지급이나 사례비 같은 제도적 보상은 요원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듯 방송 제작 시스템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팬심을 소비하는 구조

무엇보다도 불친절한 운영 방식 속에서 방송국이 아티스트 공연을 내세워 팬들에게 생색내듯 ‘자리를 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는 팬들의 마음을 이용해 무대의 분위기를 채우는 제작 자원으로 쓰는 셈이다.


팬심을 자원으로 소비하는 방송국의 행태. 그들은 방청권을 ‘특별한 기회’처럼 포장한다. 팬들이 원하는 것은 아티스트를 직접 보는 것인데, 방송국은 그 열망을 이용해서 ‘자리를 줬다’는 식으로 혜택처럼 제공한다. 실제로는 팬들이 무대의 분위기를 채워주는 ‘제작 자원’이 되는 것인데 말이다. 팬들은 시간·돈·에너지를 쓰는데, 방송국은 그걸 ‘공짜로’ 얻는 셈이니까 불균형이다.


팬클럽을 통해 집단 동원을 하게 되면 제작진 입장에서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또한 원하는 리액션과 응원을 유도함으로 편집에 유리한 장면을 쉽게 확보한다. 팬들은 ‘아티스트를 위한 응원’이라는 명분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참여하지만, 결과적으로 팬심이 제작비 절감 수단이 되는 것이다.


6시간 이상을 투자하지만, 아티스트를 직접 본다는 만족 외에는 어떤 보상도 없다. 그래서 이 구조가 불균형하다고 느낀다.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서, 대중문화 산업 전반에서 팬 노동(fan labor)이 활용되는 방식에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팬 노동의 두 얼굴

팬 노동의 긍정적 측면은 분명 존재한다.

팬들은 자발적으로 시간을 투자해 팬픽, 팬아트, 영상 편집, 응원 프로젝트 등을 만들며 아티스트의 세계관을 확장시킨다. 또한 같은 취향과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형성해 서로를 지지하는 힘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팬 노동은 문화적 자산이자 팬들에게는 성취감과 즐거움을 주는 활동이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도 크다.

기업과 방송사는 팬심을 비용 절감 수단으로만 활용하고, 팬이 만든 콘텐츠와 시간은 상업적 이익에 기여하지만 팬에게는 금전적·제도적 보상이 없다. 공급권을 쥔 제작사는 ‘보고 싶으면 조건 없이 와야 한다’는 구조를 만든다. 팬의 ‘사랑’은 자연스럽게 제공되는 자원으로 취급되고, 감정은 설득 수단으로 활용된다. 그 결과, 취미와 노동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불공정성만 남는다.



진짜 문제는 ‘자발성’의 이용 방식

팬 노동의 본질적인 문제는 자발성 자체가 아니라, 그 자발성이 일방적으로 이용되는 방식에 있다.

자발적으로 시작된 행동이라도 타인의 이익에 기여하면서 팬에게 손실만 남는다면 그것은 불공정하다. 특히 방송 제작처럼 필수 요소를 무상으로 제공하게 만드는 구조는, 사실상 팬이 사전 동의 없이 노동을 제공하는 것과 비슷하다.


방송사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팬심이 마케팅·제작비 절감 수단으로 활용된다. 기업이 얻는 이익은 막대한데, 팬이 얻는 보상은 대부분 감정적 만족에 그친다.



아티스트를 사랑하는 팬심을 그저 비용 절감 도구로만 소비하지 말고, 최소한의 보답과 존중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팬 노동이 자발성과 즐거움을 유지하면서도 공정하게 다뤄지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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