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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해진 관계

by Balbi


가장 오래된 인연과 어느 순간 관계가 소원해졌다.

특별히 어떤 일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저 각자의 삶에 치이다 보니 서서히 멀어진 것이다.


그녀와의 인연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8년 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중학교 1학년의 어린 소녀들이 50대 중년이 되었으니 요즘 들어 시간이 쏜살같이 흐른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중학교에 입학하며 같은 반이 되었는데 그녀는 28번, 나는 29번.

붙어 있는 번호 덕분에 학교생활에서 함께하는 일이 많았다. 그녀는 여성스럽고 예뻤다. 당시 학급 게시판을 꾸민다고 우리끼리 열었던 ‘미스 6반’에서 당당히 진으로 뽑힌 것도 그녀였다.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고 착했던 그녀의 매력에 이끌려 우리는 절친이 되었다.


우리가 더 끈끈해진 계기는 한 사람을 함께 좋아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방차’가 큰 인기를 끌었지만, 우리는 묘하게도 연예인보다 담임 선생님을 더 좋아했다. 돌이켜보면 아마 그게 나의 첫 덕질이 아니었을까 싶다.


학교 근처에 살던 그녀의 집 앞 정류장까지 함께 두 정거장을 걸어가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일상이 중학교 3년 내내 이어졌다. 우리의 우정은 1학년 같은 반일 때만 친밀했던 단발성 우정이 아니었다.


그러다 각자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둘 다 이사하며 멀리 떨어진 타 지역에서 살게 되었다. 지금처럼 SNS가 활발했다면 물리적 거리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테지만, 전화와 편지로만 안부를 묻던 우리는 매일 붙어 다니던 중학교 시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되었다.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하던 우리는 서로 모르는 세계에서 생활하며 그리움을 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학교 때처럼 붙어 지낼 수는 없었지만, 성인이 된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롭게 만남을 이어갔다. 여전히 ‘내 찐친은 너’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시간의 변화 속에 새로운 시절인연을 만나는 동안에도 그녀의 자리는 굳건했다. 오랜만에 만나도 마치 엊그제 본 것 같은 친밀함이 있었고, 그녀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그러나 만남의 횟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어느 순간 메울 수 없을 만큼 틈이 벌어졌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여성들의 삶은 확실히 결혼과 육아를 기점으로 크게 달라진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고 육아를 한 친구들은 대화와 공감이 이어지지만, 시기가 다르면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아마 그래서 어른들이 결혼하고 아이 낳으라고 재촉했던 게 아닐까 싶다. 공통의 관심사와 경험이 있어야 대화가 이어지고 관계가 깊어진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공통의 관심사가 없으면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고 나누는 대화는 과거에 머물게 된다.


과거의 추억 파먹기로는 더 이상 대화가 즐겁지 않다는 걸 우린 경험하게 된다. 매번 만날때마다 ‘그때 그랬지’ 식의 대화만 이어지면 어느 순간 지루해지고, 그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관심사와 대화를 위한 노력이 모든 관계에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특히 과거의 추억 파먹기와 신세한탄을 반복하는 대화는 한두 번 이상 해서는 안 된다. 서로에게 피로감만 쌓일 뿐이다.


결혼과 육아가 나보다 빨랐던 그녀와 나 사이엔 점점 틈이 생겼다. 그녀가 육아에 치일 때 나는 다른 세상에서, 내가 육아에 치일 때 그녀는 또 다른 세상을 살았다. 서로의 경험에 공감은 했지만 그 틈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은 떨칠 수 없었다.


이제 그녀와의 연락이 뜸해진 지금, 그 틈을 메워야 할지 아니면 자연스레 물 흐르듯 두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솔직히 점점 후자 쪽으로 기운다. 억지로 되는 건 없다는 걸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날이 선선해지면 지금은 없어진 중학교 흔적을 함께 찾아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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