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중·고등학생에게도 반말을 하는 것이 내 스스로 어려워졌다. 그게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해 보니,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몸이 쑥 자라 키와 몸집이 성인을 능가할 정도로 쑥 자란 아들을 보면서 그 또래들에게는 존댓말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들의 친구들까지 예외 없이 그런 건 아니다.
청소년·청년 세대를 존중하자는 의미였다. 존중의 기본은 결국 태도와 말에서 시작되니까. 남의 집 아들들에게 ‘야, 자’ 하고 반말을 하는 것은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타인이 내 아들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기분이 몹시 불쾌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나와는 달리 반말을 친근함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단 나보다 어리면 무조건 반말을 쓰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데 그 기준도 상대의 나이를 고려해가며 해야 주변 사람들도 민망하지 않다. 20~30대까지는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40대 이상이라면, 아무리 나이가 적다 해도 함부로 말을 놓기보다는 조심스럽게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청소년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이가 많은 성인이 자신보다 한두 살 어린 성인에게 반말을 하며 하대하는 모습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덕질의 영역에도 문화라는 것이 있다. 보통 일반적으로 아티스트의 이름뒤에 ‘님’을 붙여 그를 부르지만 일부 어떤 부류들은 ‘00야’하고 이름을 부른다. 그 아티스트가 10대도 아니고 20~30대의 아티스트면 옆에서 듣기 참으로 민망하다.
‘왜 저렇게 남의 집 아들 이름을 어린애 부르듯이 부르지?’
‘님’이 너무 거리감 있게 느껴진다면 최소한 ‘씨’ 정도는 붙여도 되지 않을까? 내가 사랑하는 아티스트를 어린애 대하듯 ‘00야’라고 부르는 모습은 개인적으로 영 불편하다. 반말을 해야만 관계가 돈독해지고 친밀감이 쌓이는 것은 아니다. 관계는 서로 존중하는 태도와 진심이 오갈 때 더 단단해지는 법이다.
아들뻘의 아티스트들을 좋아하면서 단 한순간도 그들에게 반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엄연한 성인이라면 당연히 존중해줘야 한다고 믿는다. 대체 언제부터 반말이 친근함의 공식이 된 걸까?
그래서 궁금증을 또 쳇샘에게 물어봤다.
쳇샘은 이렇게 말했다.
반말이 친근함의 표현으로 굳어진 데에는 언어·문화·사회적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는데, 딱 어느 시점을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대략적인 흐름은 정리할 수 있다고 했다.
조선시대 같은 전통 사회에서는 신분·나이·관계에 따라 언어가 엄격히 구분됐고, 반말은 주로 동년배나 아랫사람에게 쓰는 낮춤말이었다. 친근함보다는 서열의 표현에 가까웠다. 그래서 반말을 쓰는 순간 상대를 자기보다 낮게 두는 의미가 강했다고 한다.
20세기 들어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가치가 확산되면서 서열보다는 수평적 관계가 중요해졌다. 학교나 직장에서도 동기, 친구끼리 반말을 쓰며 친밀감을 표현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고, 이게 점차 확산되면서 “반말 = 편안하고 가까운 관계”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특히 1980~90년대 이후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이 경향이 더 강해졌다고 했다.
여기에 미디어·온라인 문화의 영향도 컸다. 인터넷 채팅, 온라인 게임, SNS가 커지면서 짧고 간결한 소통이 선호됐고, 여기서 반말이 친근함·동질감을 나타내는 공식처럼 굳어졌다. 드라마·예능에서도 주인공이 친해질 때 반말로 전환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면서 “말을 놓는 순간 = 관계가 가까워진 순간”이라는 인식이 강화됐다.
오늘날 반말은 여전히 위계적 의미를 가질 때도 있지만, 특히 젊은 세대나 온라인 공간에서는 관계를 빨리 좁히고 싶을 때 쓰는 친근함의 언어로 받아들여진다. 다만 세대·문화권에 따라 예의 문제와 맞물려 여전히 조심스러운 측면도 있다고 했다.
쳇샘의 답변을 듣고 나니 문득 ‘혹시 내가 꼰대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도 아무 때나 던지는 반말은 불쾌함을 준다. 말에는 품격이 있고, 존중의 태도는 언제나 변함없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