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취미부자다.
그중에서도 가장 꾸준히, 열심히 즐기는 취미는 아티스트 덕질이다. 그런데 다른 취미에서도 이 덕후 기질이 발휘되곤 한다. 그냥 가벼운 단순한 ‘취미 생활’이 아니고 일정 수준의 한계까지 파고드니 말이다.
사부작사부작. 한때 잠시도 쉬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손으로 무언가를 해야만 불안이 잠재워지던 시절이 있었다. 뜨개질, Dot to Dot, 캘리그라피, 수채화까지… 손이 바빠야 마음도 안정됐다. 그렇게 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얻었다. 마음에 안정을 주던 취미들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건 나이 탓이 크다고 보겠다. 손가락 관절에 무리가 오고 눈이 침침해지며 서서히 멀어졌다.
그래서 우리 집 창고에는 온갖 재료들이 쌓여있다. 뜨개실, 물감, 각종 붓, 먹물, 화선지, 팔레트. ‘언젠가 다시 하겠지.’ 라는 생각에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시간을 보내기 위한 수많은 작업들을 통해 남은 건 창고 가득 재료들……내게 남은 건 이것뿐일까?
쓸데없이 재료만 쌓여있고 시간만 흘려보낸 건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스치던 무렵, 황석희 작가의 『오역하는 말들』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다.
'한심한 시절'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어설프고 한심하고 그저 즐겁고 우스꽝스럽던 시절이. 그런 시절은 단순히 낭비된 시간이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자양분이 되는 시간이다. 사회적 기대나 압박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 인생에서 그리 길지 않다. ... 너무 건설적으로만 살려고 아등바등할 것 없다. 목적 없이 흘려보낸 한심한 시간이 역설적으로 언젠가 가장 쓸모 있는 기억이 되기도 하니까.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헛되이 흘려보냈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언젠가 나를 지탱하는 자양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조금은 힘을 빼고 이런저런 의미부여는 좀 버려두고 현재를 즐기면 그것들이 쌓여 유의미하게 쓰이는 날이 오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가끔은 ‘중년의 나이’와 ‘희망’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지 망설일 때가 있다. 희망은 왠지 젊음과 청춘의 전유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년에도 여전히 이루고 싶은 것, 꿈꾸는 것들이 있다.
희망을 잃는 순간 삶은 멈춘다. 나이는 희망을 제한하는 경계가 아니라, 희망을 품는 방식이 바뀌는 시점일 뿐이다. 희망을 품는 한, 나의 취미와 시간들도 언젠가 또 다른 빛을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