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그림 하나로 세계를 사로잡은 작가 김창렬의 전시회에 다녀왔다. 요즘 거의 매주 광화문 일대를 방문하고 있다. 서울에서 가장 애정하는 동네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펼쳐진 종로는 언제 가도 매력적이다. 지난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을 시작으로 미술관 투어를 하고 있다. 미술관이 좋은 이유는 콘서트나 연주회가 주는 감동과는 또 다른 무언가는 안겨준다.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를 남기고, 동시에 설렘을 선사한다.
이번 주말, 김창열 작가의 작품이 나에게 남겨준 건 ‘무모함’, ‘도전정신’, ‘우연’, ‘운명’ 같은 단어였다. 물방울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초기작에는 물방울의 흔적조차 없었다. 추상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로 캔버스에 두껍고 거친 질감으로 선하나가 표현되어 있고, 그 이후에는 기하학적 형태가 등장하며, 화면에는 착시와 원근감이 표현되었다. 그 어디에서도 이후의 작품으로 물방울 연작이 나오리라 상상할 수 없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며 그는 작업실에서 재사용할 캔버스 위에 맺힌 물방울을 보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고 한다. 우연처럼 찾아온 물방울이 그의 상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예술은 우연의 산물일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단순한 우연이라 부르는 건, 수십 년 동안 치열하게 작업을 이어온 한 작가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수많은 고민과 실험이 있었기에, 누군가는 스쳐 지나갈 순간에 그는 물방울을 보았을테니 말이다.
김창열(1929–2021)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다. 이번 전시는 그의 예술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회고전으로, 한국 근현대사와 미술사 속에서 그의 작업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전쟁과 분단, 산업화와 도시화로 이어지는 급격한 근대화의 과정은 그의 내면에 깊은 상흔을 남겼고, 이는 고유한 조형 언어로 승화되었다.
그는 1950년대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하며 서구 현대미술의 어법을 한국적 정서와 접목하는 데 앞장섰다. 1965년 뉴욕에서의 활동을 거쳐 1969년 파리에 정착하기까지, 그는 실험과 도전의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1970년대 초, 물방울 회화의 여정이 시작됐다. 물방울은 그의 평생의 주제가 되었고, 김창열을 상징하는 예술적 언어로 자리 잡았다.
물방울은 어느 날 우연히 캔버스에 맺혔을 뿐이지만, 그것을 ‘보는 눈’을 가진 건 김창열이었다. 무형식의 시대를 지나, 마침내 그만의 형식을 만들어냈다. 예술은 결국 ‘보는 눈’과 ‘듣는 귀’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일이다. 그 세계를 대중이 빠르게 알아봐준다면 행복하게 이어가고, 그렇지 않다면 묵묵히 걸어가는 것일 뿐이다.
앵포르멜(Informel) 미술은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 유럽,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추상 미술 운동 이다. ‘앵포르멜(Informel)’은 프랑스어로 ‘형식이 없다’(in-formel)는 뜻으로, 말 그대로 정형화된 형태나 질서, 구성을 거부한 자유로운 표현의 미술을 말하고 있다.
✨ 개념과 특징
1. 형식의 부정
* 앵포르멜 작가들은 기하학적 구성이나 구체적 형태를 모두 부정하고, 감정과 무의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즉흥적 표현을 추구했다.
* 작품에는 붓 자국, 물감의 질감, 캔버스 위의 우연한 흔적 등이 그대로 살아 있다.
2. 감정의 직접적 표출
* 작가의 내면 감정, 불안, 분노, 자유에 대한 열망이 화면 전체에 드러난다.
* 회화가 어떤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심리적 행위 자체로 여겨졌다.
3. ‘행위’로서의 회화
*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가 작품의 본질이었다.
* 물감을 흘리거나, 긁거나, 던지는 등 비전통적 행위를 통해 표현이 이뤄졌다.
* 이런 점에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Action Painting)와도 닮아 있다.
✨ 역사적 배경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전쟁의 상처와 불안, 허무를 겪고 있었다.
* 기존의 합리주의적 미학이나 기하학적 추상(몬드리안 등)은 그 시대의 감정을 담아내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졌다.
* 이에 예술가들은 이성과 질서를 거부하고, 감정과 존재의 불안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새로운 미술을 찾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앵포르멜이었다.
✨ 대표 작가
* 장 포트리에(Jean Fautrier) : 앵포르멜의 선구자로, 거칠고 두꺼운 질감으로 인간의 고통을 표현했다.
* 장 뒤뷔페(Jean Dubuffet) : ‘아르 브뤼(Art Brut, 순수미술)’ 개념을 제시하며, 문명 이전의 원초적 표현을 추구했다.
*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s) : 검정의 깊이와 질감으로 유명, ‘빛을 그리는 검정’으로 불린다.
✨ 한국의 앵포르멜
* 1950년대 후반, 전쟁 직후의 한국에서도 앵포르멜은 큰 영향을 주었다.
* 전후의 혼란과 절망 속에서 한국 작가들도 추상적이면서 감정적인 표현을 시도했다.
* 대표적인 작가로 유영국, 박서보, 윤형근, 김창열 등이 있다.
* 특히 김창열은 ‘물방울’ 회화 이전에 앵포르멜 시기를 거치며 내면의 혼돈과 물질성을 탐구했다.
요약하자면, 앵포르멜 미술은 형식을 깨고 감정과 존재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무형식의 추상미술’로, 전쟁 이후 인간의 내면을 솔직히 마주한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