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다. 특히 일본 작가의 책은 손에 꼽을 정도로 아주 소량만 접해왔다. 그중 하나가 며칠 전 완독에 성공한 『인간실격』이다. 일본 작가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진 것인지, 소설은 의외로 잘 읽혔다.
어딘지 모르게 나약해빠진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이리저리 회피하고, 그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태도가 다소 어이없게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1948년에 발표된 이 소설 속에도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요새 같은 세상에 제국 대학을 나와도...”
단 한 문장이지만,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힘겹게 살아가고 있구나 싶었다. 요즘 세상에서도 참 많이 듣는 말인데, 80여 년 전 소설에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간판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다기보다는… 아니, 오히려 80여 년 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 온 말이기에 간판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말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나약한 주인공의 주변에는 여러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왜 그리도 희생적이고 착해빠졌을까. 그 시대의 모든 여인들이 그러했을 리는 없을 텐데, 연약한 주인공에게 측인지심을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가장 요주의 인물은 호리키라는 생각이 강하게 남는다. 가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사람, 친구는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람은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 우리는 학창 시절을 보내며 동급생을 ‘친구’라는 단어 하나로 뭉뚱그려 표현해 왔다. 엄밀히 따지면 친구가 아닌데도 말이다. 그 표현으로 오히려 관계의 중요성이 흐려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유튜브에서 오은영 박사님이 그 관계의 호칭에 대해 ‘클래스메이트’라고 정정해 주는 것을 보며, 정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란 마음을 나누는 관계인데, 모든 반 아이들과 그런 관계를 맺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런 표현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는 아이들이 오히려 더 힘들어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없는데도, 그 단어 하나로 퉁치며 모두와 잘 지내야 한다고 은근히 압박하는 듯 느껴져서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폭력은 오래전 우리의 학창 시절에도 존재했다. 다만 그것이 ‘학교폭력’이라는 단어로 규정되지 않았을 뿐이다. 최근 본 영상에서 소개된 교묘한 학교폭력의 예는 개입이 더더욱 어려운 경우였다. 함께 어울리는 무리 안에서 특정 한 명을 은근히 따돌리는 상황이다. 무리에서 내쳐지는 것이 두려운 아이들은 그것을 그냥 넘기고, 부모의 개입을 거부하기도 한다. 때로는 부모 역시 그 정도는 혼자 헤쳐 나가야 한다며 지켜보는 경우도 있다.
소설을 읽은 후 아이들에게 친구 관계에 대해 일장연설을 한 것을 보면, 인간관계는 그만큼 신중해야 하고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 호리키를 떠올리며, 그와 닮은 얼굴들이 교실과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