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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코니 Mar 16. 2022

잠들기 전에 읽는 백일야화(百日夜話)

일곱 번째 밤 - 강의 여신(2)





여신은 왼손에 든 작은 등에 불을 붙였다.


심지가 곧 환하게 빛났다.      


“자, 이리 와서 불빛을 들여다보아라.”     


여신은 앞에 선 사람 가슴 가까이 등불을 가져다 댔다. 애타게 기도했던 이의 품에 다가간 불빛은 잠시 어두워졌다. 등잔불 심지가 거의 꺼질 듯 작게 줄어들고 대신 서 있는 사람 가슴 한가운데에 동그란 빛무리가 생겼다. 


은반지처럼 동그란 빛무리를 확인한 여신은 다시 등불을 자기 쪽으로 당겨 어깨 높이까지 들었다. 그러자 기도를 올린 이의 가슴께에 있던 빛무리가 빠져나와 허공에 둥실 떴다. 마치 불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 동그라미 안에 너의 궁금증을 풀어 줄 열쇠가 보일 것이다.”     


여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빛무리 한가운데가 물결처럼 일렁였다. 안개 덩어리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대다 곧 무언가 알아볼 수 있는 형체로 뭉쳤다. 


"아니! 저 장면은!"


기도를 올린 이가 흠칫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여신과 인간 사이에 떠 있는 동그란 테두리 안에 마치 흑백 영화처럼 무채색 영상이 비쳤다.

자신의 가슴에서 배어 나온 빛무리를 올려다본 사람은 놀라움에 입을 벌렸다. 잊고 있었던, 하지만 깊은 무의식 속에 숨은 채 그 주인의 마음과 정신을 휘두르는 어떤 사람, 어느 때가 생생하게 비쳤다. 움직이는 그림을 본 사람은 그제야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슬픔이 무언지 기억해 냈다. 그리고 어김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강의 여신이 인간에게 물었다.


“네 슬픔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아보겠느냐?”


어떤 이는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일이 지금의 슬픔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 등불이 비치는 장면은 네 마음속에 살아있는 기억이다."


여신이 다시 물었다. 


"자, 이제 슬픔의 씨앗이 무언지 알게 되었으니 어찌하겠느냐."


기도를 올린 사람은 슬픔이 고이게 된 원인을 해결하러 가겠다고 대꾸했다. 여신은 슬픔을 풀어내기 위해 돌아서는 이에게 말했다.


“슬픔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면 내게 다시 와라. 와서 그 슬픔이 정말 깔끔히 사라졌는지 다시 한번 등불을 비춰보자.”


여신의 친절한 제안에 감동한 사람은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총총히 사라졌다. 

시간이 흐른 후, 약속한 이들이 다시 강가로 돌아와 여신을 찾았다. 슬픔의 원인을 찾아내 해결하고 왔다는 사람들 표정은 처음보다 밝고 가벼웠다. 


“이제 제 마음 안에 고여 있던 슬픔을 모두 몰아냈습니다.”


강의 여신은 차분히 등불에 불을 밝혔다.


“나도 네 슬픔이 깨끗이 사라졌기를 바란다.”


여신이 대답과 함께 슬픔의 등불을 다시 한번 밝혔다. 일렁이는 불빛이 비치는 가슴 한가운데서 빛무리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빛무리 안에서 나타나는 빛 그림은 처음 봤던 그 장면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그 장면을 본 사람이 깜짝 놀라 물었다.


“묵은 일을 깔끔히 해결하고 왔는데 슬픔이 왜 그대로 남아있는 거죠?”


강의 여신이 대답했다.


“슬픔의 싹이 어디서 텄는지 들여다보는 일은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누구 때문에, 어떤 일 때문에 생긴 슬픔은 그 원인을 찾아내어 매듭짓는다고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다. 슬픔을 안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 마음에서 떠나보내야 한다. 그래야 완전히 씻기는 법이다.”


그 말에 강의 여신을 찾은 사람이 물었다. 


“그렇다면 슬픔을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완전히 씻어내는 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강의 여신은 두 손 모아 매달리는 사람을 굽어보았다.  


“방법은 내게 있는 게 아니다. 네 손에 이미 쥐고 있다. 다만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 


사람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먹을 펼치자 핏기만 선명한 빈 손뿐이었다. 여신 앞에 선 사람이 두 손을 내보이며 초조하게 대답했다.

 

“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요.”


여신이 빈 손바닥을 향해 빙그레 웃음 지었다. 


"내게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어째서 주인의 눈에는 띄지 않는지 모르겠군.”


인내심이 다한 이가 손을 거두어들이며 조바심을 냈다.


“도대체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자꾸 빙빙 돌리지 말고 말씀해 주세요.”


여신을 처음 만났을 때 표하던 경외의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좀먹는 슬픔이라는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지칠 대로 지친 모양이었다. 가련한 모습이었으나 세상살이에 부대끼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모습을 한 번쯤을 보였으리라. 

강의 여신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손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기 강가 모래톱에 잠시 앉아 숨을 돌리거라. 지치고 조급한 마음이 가라앉으면 네 손에 든 열쇠가 보일 것이다.”


여신은 여기까지 말하고 천천히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뒤에서 뭐라고 묻건, 애원하건, 소리치건 안 들리는 듯 안개처럼 물속으로 잠겼다. 여신을 놓친 사람은 망연자실 서 있다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뗐다. 어쨌든 이 강에 와서 여신에게 기도한 후 끈질기게 괴롭혔던 슬픔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왔다는 증언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속는 셈 치고 시키는 대로 해보자.”


슬픔에 빠진 사람은 터덜터덜 강가 모래사장으로 가 앉았다.     


(계속)


슬픔의 등에 비친 사연은 모두 제 각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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