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여신은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여신이 사는 강은 대양의 한가운데처럼 맑고 넓었다. 너른 강변에는 모래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처럼 푸른 강물 위로 석양이 발갛게 물들 때 강변 모래는 금가루처럼 반짝였다. 강가를 이루는 모래톱이 햇살에 반짝일 때는 삶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듯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보고 있자면 영겁의 시간 속에 빨려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이 강을 ‘시간의 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강의 진짜 이름은 ‘슬픔의 강’이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곳에 왜 그런 무거운 이름이 지어졌는지는 이제부터 알아볼 일이다.
강의 여신은 강물 속 깊은 바위 동굴에 살고 있었다.
오랜 장마 끝에 강물이 범람해 육지를 침범할 때를 제외하고 여신이 강 위로 올라오는 예는 거의 없었다. 단 한 가지 예외라면 자신에게 진심 어린 기도를 올리는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때이다. 강가에는 밤이나 낮이나 여신을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슬픔의 강을 찾아오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순례자들의 안식처이자 나그네들의 쉼터였다. 슬픔의 강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본 적 없는 사람이란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은둔자뿐이었다. 자아내는 풍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진 강가에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 간절한 기원을 품고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강의 여신에게 소원을 빌러 오는 사람들이었다. 모래톱에 발이 잠기도록 서서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이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강의 여신을 애타게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알지 못할 슬픔에 빠져 삶의 의욕을 잃고 죽음을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애처로운 운명의 주인공들은 스스로 목숨을 져버리기 전 마지막으로 강의 여신을 찾아왔다.
'위대한 힘을 가진 여신이여! 제발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간절함이 차오를 대로 차올라 목소리마저 희미해질 때 여신은 기도하는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 물안개가 자욱한 새벽, 동트기 바로 직전 여신은 물가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밤새 기도를 올리고 동녘 하늘이 환해지는 걸 지켜보다 여신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여신은 물결처럼 출렁이는 녹청색 드레스 차림이었다. 왼손에는 소박하지만, 기품 있는 등잔을 들고 있었다. 긴 머리는 깊은 강물처럼 푸른색으로 일렁였다. 여신의 얼굴은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온화한 표정 아래로 신이 갖는 근엄함이 자리했다.
물가로 천천히 걸어 나온 여신은 자신을 부른 사람 앞으로 다가갔다. 목이 빠져라 여신을 기다리던 사람은 막상 여신이 코앞에 나타나자 두려움에 뒷걸음을 쳤다.
“네가 나를 불렀느냐.”
강의 여신이 부드럽게 물으면 그제야 정신이 든 사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강의 여신님! 제 마음속에 드리운 슬픔을 거두어 주십시오!”
알지 못할 슬픔에 시달리느라 지칠 대로 지친 사람이 두 손을 모으며 덧붙였다.
“여신님을 찾으면 슬픔을 없앨 방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신이 다시 물었다.
“네 마음을 가득 채운 슬픔은 무엇 때문이냐.”
“제 슬픔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병이 든 탓 같습니다.”
여신이 말했다.
“모든 병에 원인이 있듯 모든 슬픔에도 제각기 생겨난 이유가 있는 법.”
하지만 사람은 고개를 완강히 저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 때문에 슬픔에 빠진 건 지 알 길이 없습니다."
여신을 불러낸 사람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 고통을 짊어질 만큼 잘못한 일이 없다고 강변했다. 그런데 왜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야 하는 지 억울하다고 했다. 사람들은 어쩌면 슬픔을 없애달라는 소원보다 왜 자신이 슬픔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여신을 찾아온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신은 참을성 있게 넋두리를 들어준 후 이렇게 말했다.
"자,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너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