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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렌 Jul 02. 2020

인간성을 파괴한 초코파이의 기억.

생을 마감한 철인 3종 운동선수의 명복을 빌며

청소년 대표, 국가대표를 한 운동선수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번 뉴스를 보다가, 20만원 어치의 빵을 억지로 먹게 했다는 이야기에 문득 떠오른 과거.




이등병으로 자대 배치를 받은 지 한 달 정도 지났던 말 한 선임이 불러 손을 잡고 PX에 들어섰다. 상병 진급을 한두 달 남기고 있던 윤모 일병은(정말 이 글을 쓰는 지금 이름이 정확히 딱 떠올랐다!!!) 나를 데리고 초코파이를 한 박스 사서 자리에 마주보고 앉았다.  그리고 그놈은 그 자리에서 첫 번째 초코파이를 까서 '아' 하며 까넣어주려 했고 나는 반사적으로 손으로 받아먹으려 했지만 갑자기 그는 인상을 팍 쓰며 내 입에 넣었다. 놀랐지만 뭐, 한 두어 번 씹었나, 그때 그는 바로 또 하나를 깠다. 그리고 또 내 입에 처넣었다. 너무 놀랐지만 아무 대응을 할 수 없던 나는 입에 두 개의 초코파이를 받아 넣고 목이 메는 상황이었는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손은 세 번째 초코파이를 까고 있었고 난 몇 번 씹지도 못하고 다시 세 번째 초코파이가 내 입에 쑤셔박히는 상황이 되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나는 목은 메이고 눈은 눈물이 팽 도는 상황이 되었고 급기야 입에서는 초코파이 쪼가리들이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그제야 우리 테이블을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자동으로 네 번째 초코파이를 내 입에 처넣는 중이었고...... 나중엔 그냥 입에 뭉개버리고 있었다. 그제야 윤일병의 한 달 후임이자 가장 친했던 김 모 일병이 와서 말리기 시작했고 난 비닐봉지를 얻어 다 토해버렸다. 그 또라이의 눈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보다 한 살 어렸고 왜소했던 그놈을 지금이라도 만나면 그냥 두진 않을 것이다.


몇 달 후, 악몽의 부대를 벗어났다 생각했는데 악몽은 시작도 안 했던 거라는 걸 곧 깨달았다. 나는 내 동기들과 새벽마다 술에 취한 고참들에게 두어 시간씩 맞고 얼차려를 받았다. 이유는 없었다. 그 폭력을 정확히 1년 겪었다. 주 3-4회 이상을. 상병이던 어느 날은 동기와 함께 부대 복귀를 하니 내무반 앞에 서너 달 선임이던 상병 둘이 활동복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 길로 지하 보일러실로 끌려갔고, 정확히 밤 12시부터 새벽 5시 30분까지 먼지 나게, 정말 이렇게까지 때리고 맞는 게 현실에서 가능한가 싶게 두들겨 맞았다. 내 동기는 2시가 못 되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채로 대걸레 자루와 빗자루로 계속 욕을 먹으며 두들겨 맞고 있었고, 나는 샌드백이 되어 철문 앞에 서서 펀치와 날라차기를 맞아가며 철문에 처박히고 있었다. 둘은 서로 때리다 지치면 하이파이브를 하고 교체해서 상대를 바꿔서 때렸다. 나름 강골인 나는 새벽 내내 죽어라고 맞았다. 5시 30분까지 쓰러져도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서 맞았다. 내 동기처럼 쓰러지기 싫었다. 그들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오기였던 것 같다. 서로 번갈아 터치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즐기며 두들겨 패던 그 녀석들, 그중 제주도 출신의 축구 잘하던 김상병의 비웃음 가득한 썩은 표정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5시 30분이 되자 둘은 올라가서 씻고 6시에 점호 직전에 누워있다가 점호를 받으라 했고 우리는 그렇게 했다. 선임들은 멍 투성이인 나와 내 동기의 얼굴이 장교에게 보이지 않게 시선을 가렸다. 동기 녀석은 어떻게 서 있는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중에 그는 일부러 쓰려졌다고, 덜 맞으려고 그랬다는 말을 했고,그 후로도 몇 번의 폭행에 더 휘말렸다 일이 커져 결국 타 부대로 전출을 갔다. 피해자고 가해자고 똑같은 처벌을 받는 게 군대다.) 그리고 마침 그 날은 내가 여자친구 면회로 외출을 나가는 날이었는데 정말 온몸이, 특별히 상체 앞쪽은 팔꿈치부터 가슴, 배 전부가 피멍인 채로 절뚝이며 부축받고 외출을 나갔다. 카페에 가서 여자친구는 내 군복 상의 단추 안을 확인하고는 내내 소리 내 울었고 나는 그냥 쓰러져 잤다.


훗날 제대 후 몇 년이 흐른 뒤 서른 가까이 되었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내게 군생활 편히 했다고 놀리시기에 그 날들을 이야기하고 여전히 가슴을 피면 가슴뼈가 아프다고 하니 얼굴이 시퍼렇게 변할 정도로 분노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들이 왜 그랬는지, 나는 왜 그리 맞아야 했는지 20년이 지난 지금이나 그 때나 묻고 싶지 않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이유가 이유 같아야 이유가 중요한 것이다.




난, 그래도 군대는 나름의 가치와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평생에 맞았던 것의 팔 할을 -나머지 이 할의 가해자는 형이다.- 군대에서 맞았지만 그 시절이 전부 악몽이고 지워내야 하는 기억은 아니다. 난 여전히 아이들에게 초코파이를 사주고 나도 가끔 먹는다. 지금 내겐 그게 트라우마는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러니까 운 좋게 이겨내는 소수도 있지만 이겨내지 못하고 인생을 끝내는 소수도 있다. 폭력 없는 사회는 있을 수도 없고 그런 걸 바라지도 않는데, 그래도 인간이, 사람이 좀 견딜 정도만큼만 하면 안 될까? 자기 인생도 한 순간에 종칠 수 있는데, 서로 인생 다 망치지 않게 말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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