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주일체(職住一體)의 삶.
출퇴근으로 버리는 시간을 없애다.
이민을 온 후 얼마간은 언어를 배우느라 일을 본격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사실 적응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사무실에 본격적으로 출근하며 일을 하게 되면서는 출퇴근에 각각 20분 남짓 소요되었다, 하루에 대략 평균 50분을 사용한 셈이다. 초반에는 운전기사를 고용해서 아이들의 등하교를 해결했다. 하지만 방어운전 개념이 전무하고 운전이 너무 서툰데다, 기사의 잘못으로 사고가 나도 내 보험으로 처리하고 그의 실수까지도 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이 사회의 현실이 나로 하여금 운전기사를 무용한 존재처럼 느끼게 하여 기사를 쓰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들 등하교에도 40-50분을 썼다.
어찌 보면 서울에 살 때보다 많다고는 볼 수 없는 시간이다. 하루 한 시간 삼십 분을 거리에서 버리는 것은 말이다. 서울에 살 때 나는 매일 한 시간을 출퇴근에 썼다. 등하교 문제에서는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출퇴근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았기에 이 부분은 지금과 똑같다. 수도권 신도시에 살며 직장 생활을 하던 때에는 하루에 최대 3시간을 쓰기도 했다. 대학교 때 학교 앞에 혼자 살던 2년을 제외하면 적게는 왕복 한 시간, 많게는 3시간을 지하철에서 보냈다.
그때는 젊었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크게 들지는 않았다. 지하철을 탈 때는 때로 신문이나 책을 읽었고 차로 통학하거나 출퇴근을 할 때는 라디오를 듣기도 하고, 2010년 이후로는 차가 사무실이나 마찬가지였을 정도로 일에 매진했다. 차에서도 쉴 시간이 없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여기서 하루 1시간 이상을 거리에서 버리는 지금, 40대인 나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한다. 내 인생은 지금이 황금기이고 이제 이 황금기가 기껏 5년 남았으면 다행인데 길에서 시간을 버리는 건 정말 우울한 일이다.
지금은 집이 사무실이다, 출퇴근이 없다.
아이들 등하교는 개인 비서를 시키는데 그도 운전은 못 하지만 학교도 집에서 10분 거리라 걱정은 덜하고, 운전기사에 비해 직무가 다양한 개인 비서인 덕분에 급여가 운전기사 대비 높지만 상대적으로 그만큼 만족도가 높다, 다양한 일을 공적으로 사적으로 모두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사무실에서 하는 업무를 지원하게 시켜도 되고 개인용무를 시켜도 된다, 운전기사로 뽑은 사람은 운전만 하려고 하기 때문에 급여 대비 만족도가 낮았지만 개인 비서는 채용 시 이미 직무 범위에 아이들 등하교가 주요 업무 중 하나였기에 직무 충돌 문제도 없어서 이런 점에서 만족도가 좋다. 특히 경제 수준이 낮은 나라에서 차를 이용해서 일을 하는 직업은 편하고 험하지 않은 일이라는 점에서 선호도가 높은 편이다.(우리나라 80년대 개인택시가 꽤 좋은 직업 중 하나였던 것과 마찬가지) 마침 아내 차와 동일한 차를 소유하고 있던 친구라 운전이 내 마음에 차지는 않아도 조금 마음은 편하다.
지금의 직주일체 환경을 갖추고 나서는 비서를 채용하기 전에도 등하교에는 하루에 30분을 채 쓰지 않았고, 앞으로 비서가 그만두거나 해도 역시 가까우니 부담이 없다. 오가는 길에 좋은 카페가 하나 들어오면 나로서는 외려 반길만한 일이다. 애들 데려다주고 커피 한 잔 마시고 들어와서 일을 시작하는 건 카페 주인만큼이나 괜찮은 그림이다.
직주일체, 직장과 거주지가 동일한 곳에 있다는 것에 단점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재벌도, 권력자도 살 수 없는 시간을 확실히 벌었다는 점에서 만족도가 높다, 직주일체가 가능한 홈 워킹 프리랜서와 달리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사무실이 중정을 두고 집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참 편리하다. 거주공간과 사무실을 같은 건물 내에서 층으로 분리한 게 아니라 건물로 분리한 것이 주효했다. 같은 건물의 층만 다르다면 분명 지금보다는 불편함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하교 후 집에 오면 문만 열고 나가서 마중을 하고 집 거실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사무실로 와도 되고, 굳이 사무실로 돌아갈 필요가 없는 때는 그냥 그대로 나도 퇴근한다. 요즘처럼 가급적 재택근무를 권고하는 때에도 사무실에 나가는 일을 극단적으로 줄이고 필수 인원만 근무하게 해 두면서 관리가 가능하다.
더운 나라인데다 딱히 옷차림에 규제가 없게 만든 직장 문화 역시 직주일체의 삶에 딱 알맞다. 외국인 사장은 이런 점에서 자유롭게 조직 문화를 만들 수 있다. 직원들이 외국인인 나에게 의문을 품지 않는다. 직원들도 동종의 타 업체들 대비 더 편한 차림으로 다닌다. 보수적인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 문만 열고 나오는 나는 반바지 차림으로 사무실에 드나들어도 이상할 게 없고, 아니 90퍼센트는 반바지 차림이고, 당연히 아침에 서울에서처럼 사무실 나가기 위해 옷매무새를 만지는 시간도 없다. 확실히 시간이 많이 남는 셈이다.
소위 워라밸의 핵심은 시간일 것이다, 선택과 집중도 중요하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야근이 적고 주말 근무가 없거나 하여 절대적인 여가 시간이 확보되야 삶의 밸런스를 통제할 수 있다.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1-2시간이 훌쩍 넘는다면 곤란하다. 24시간 중 2시간이면 거의 10퍼센트에 육박한다. 3끼 식사에도 2시간을 안 쓰는 게 현대인인데 직장, 회사에 오가는 길에만 그 시간을 쓴다는 건 정말 아까운 일이다. 오가는 시간에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알차게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건 차선책이지 최선책은 아니다.
주 5일 근무는 사실 내 사업을 하는 내게는 10년 전부터 의미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일을 하는 이상 일은 나의 삶이나 마찬가지라 그 자체로 이미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 직주일체의 삶이었다. 일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수입도 어느 정도는 비례하여, 총 근무시간이 지나치게 늘어나지 않는다면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일한다는 그 자체가 불만인 적은 없었다. 쉬는 날이 꼭 주말이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토일 일하고 월요일에 스케쥴 조정해서 쉬어도 되었다. 나는 젊었고, 일은 재미있었고, 성장하는만큼 수입도 늘어나는 데다 그 주말 근무나 야근조차도 내가 얼마든지 컨트롤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불만 따위는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도 상황에 따라 주말에, 밤에, 휴일에 근무를 한다. 하지만 불만이 없다. 일이 있을 때는 집중해서 하고 일이 없을 때는 월요일 아침이어도 과감하게 쉰다. 때에 따라 대중이 없긴 하지만 평균 주당 근무시간은 30시간에 미치지 않는다.
그런데 길에서 버리는 시간도 없으니!!!
시간 부자가 되면 삶의 여유는 따라온다. 돈을 벌어도 시간이 없는 삶에는 여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