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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렌 May 22. 2020

이민 5년을 지나 돌아본 이민자의 삶.

언어와 문화, 이게 이민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전부다.

나는 이민자다. 햇수로는 7년, 만 6년이 다가온다.

최초 1-2년 정도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슬럼프, 그리고 여기저기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 등을 겪었던 기억이 많이 난다. 집과 사람 때문에 엄청 고생을 했었다.


내가 이민 온 곳은 비영어권 아시아이다. 어찌보면 대표적인 무연고 이민이다. 친구 하나, 친인척이나 지인 하나 없는 곳으로 우리 가족 네 명이 왔다. 그러나 지금 적는 이야기는 아마도 네이티브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상태에서 영어권으로 이민을 가거나 주재원으로 몇 년 살던 곳에 그냥 주저앉는 사람이 아닌 이상은 다 비슷하게 공감을 하지 않을까 싶다. 

이민 후의 스트레스는 내가 언어와 현지 문화를 이해하는 수준이 높아질수록 줄어든다. 이민자면 뭐랄까, 하나의 새로운 개체로의 탄생인 것 같다. 새로운 탄생이라고 봐도 좋다.

이민자로서 처음 정착한 내가 아주 빠르게 유아-유치원생-초/중/고/대학생-사회인... 으로 성장해가는 것이다. 생물로 생각하면 진화하는 과정이라 봐도 무방한 것 같다. 굉장히 압축해서 성장하고 진화하는 느낌이다.

이민 1-2년 차는 아기-유치원생 정도 수준이라고 할까. 모든 게 어설프고 작은 일에 울고 불고 하는 아이와 같다. 간단한 의사소통도 원활하게 되지 않는다. 그러다 내가 성장하고 진화하는 것에 맞춰서 주변 세상이 다르게 다가오고 다르게 느껴진다.

근 몇 년 트렌디한 한달살기, 덕분에 온라인에는 언뜻 깊어 보이는 여행 정보가 더욱 많다. 거주까지는 몰라도 체류하기 위한 정보들은 어느 정도 충분해 보인다. 다만 조금 잘 보시길 바란다. 이민을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의 정보든 이민을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한달살기하는 분들이 적는 정보는 참고자료로서 적절치가 못할 경우가 많다.(반대로 한달살기 할 분들에게는 한달살기 한 분이 적은 정보가 더 유의미할지도.) 특히 산다, 살고 있다는 말이 헷갈리게 하니 주의가 필요하다. 거기 산다해서 열심히 관심을 갖고 보니 고작 한두 달, 여행하다 잠시 눌러 앉아본 정도인 경우도 너무 많다. 말장난 같다.

아무튼 내가 이민 와서 몇 개월, 1년 차 때 알던 것들이 지금 봐서는 틀린 건 많지 않을 수 있지만 그건 전체 사실의 아주 일부분일 때가 많다. 한달살기하며 겪은 걸 이게 사실이라는 식으로 쓰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 그 경험에 대해 적은 그 배경 설명은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의 아주 극히 일부분만 적은 경우가 많다. 아는 게 얕고 적으니까.

그 이유는 한달살기 정도로는, 제대로 된 신분을 갖추지 않고 그냥 무작정 체류하는 정도로는 햇수가 아무리 쌓여도 언어나 신분 문제로 접근하지 못하는 정보이거나 제도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신분을 갖추고 거주하는 사람들만이 해외에서 소득을 올리고 근로를 하고, 은행거래를 하고, 전기/가스/통신료 등을 후불제로 한국처럼 내고 현지 발행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으며, 자동차나 바이크를 자기 명의로 구입할 수 있는 것이다. 금융이나 투자 정보 같은 것들도 해당 신분자들이나 접근할 수 있다. 면허증을 두고 말하자면 면허증을 취득할 수 없는 이들이 국제 운전면허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계좌나 신용카드를 개설할 신분과 신용이 없으니까 자국 신용카드로 환율 부담과 수수료 부담을 감수하고 쓰는 것이다. 건강/의료보험도 마찬가지다. 현지 병원을 현지 보험으로 처리할 수 없으니까 감기로 병원에 가도 십수만 원을 쓰는 거다. 프리랜서는 이런 건강보험의 이점을 누릴 수 없다. 프리랜서로는 세금도 내지 않으니 세금이 커버해주는 영역, 신분이 주는 혜택은 남 일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1-2년 정도 체류하는 사람들이 주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체로 전체의 일부분만을 볼 수밖에 없는 정보의 구조, 사회의 시스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껏 집주인이나 택시기사,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물어 얻는 정보에 기대는데 한국에서 그렇게 제대로 된 정보가 오가는지 생각해보자. 금융정보는 은행에서, 사회이슈는 신문이나 뉴스로, 또 어떤 정보는 해당 관공서에 문의해야 한다. 부동산은 부동산 뉴스나 부동산에 가서 얻는 것이다. 그런데 말을 못 하니 그게 잘 안 된다. 그러니까 고졸인, 이미 은퇴한, 전업주부인 주변의 아는 사람들한테 기댄다. 제대로 된 정보를 줄 사람들이 상대해주지 않으니까.

이런 점에서 이민의 최우선 과제는 언어, 문화다. 그리고 제대로 된 신분을 갖추는 것이다.


호주나 뉴질랜드에 워킹홀리데이로 간 사람들을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가진 사람들이 잘 상대해주지 않거나 같이 어울리기가 어려운 이유도 이것이다. 이쪽은 줄 것만 있고 받을 게 없다. 정상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문화도 그러하다.


아파트 단지라는 전 세계의 유일무이한 거주 환경을 가진 한국인들의 문화에 외국인들이 적응하기 어렵듯 외국의 단독주택 문화나 단지 중심의 문화가 없는 거주 문화는 어렵다. 집의 구조도 사뭇 다르다. 건축 방식도 다르다. 냉방이든 히터든 그것도 다르다.


​애들이 집에서 나가서 차 없는 안전한 단지 내 인도를 걸어서 단지 내 초등학교에 가는 일 따위는 없다. 촘촘한 대중교통 그런 것도 없다. 적응해야 하는 것은 전방위적이다.

난  도시이긴 해도 강남의 단독주택에 살다 왔는데도 단독주택의 형태나 구조, 크기가 다른 이곳의 단독주택 삶에 적응하는데 한참 걸렸다. 마을이나 거주지 한 단위의 규칙이나 생활방식, 동장/통장/이장 등이 갖는 권리와 책임 등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만큼 다르다.


이민 3-4년 차에 접어들며 일상생활에 적응이 되고 나면, 가장 성장하는 것은 역시 '일'인 것 같다. 이민 초기 일상에서의 스트레스는 얼추 해소가 되지만 일은 또 다르다. 그만큼 더 깊게 들어가지 않으면 어려운 게 일이다. 어느 분야나 경쟁자들이 많고 매출과 소득을 올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에서의 스트레스 역시 나의 성장에 맞춰 더 좋은, 잘 맞는 직원들을 구해서 데리고 있으면서 상당 부분 해소가 되는 게 그즈음이다. 비영어권 국가에서 영어에 의존할 때와 아닐 때의 차이는 극명하다.

이민을 결정하고 거주지,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거의 모든 것의 변화'다.

이민자가 되는 순간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귀로 소리를, 말을 듣는다. 이민자는 이민을 와서 그 과정을 성인인 몸으로 외국에서 겪는 것이다. 그런데 압축해서 경험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미 세상에 대한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정립되었기 때문에  매우 스트레스가 크다.


체류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모르고 지나가지만, 일상을 그대로 옮겨와 거주하는 거주자들은 사실 계속 부딪힌다.

한국에서 살던 일상의 어느 부분이 결여된 상태로 여행을 한 곳에 머물러하는 형태에 가까운 체류자들은 한 발만 던져두고 있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도 않고 환경 개선의 의지도 거주자들에 비하면 조금 낮다. 아무래도 언어 역시 그 장벽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당장 몇 개월 1년 정도 있어볼 예정이고 현지인들과 일하는 것도 아니고 생계를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니 언어를 배우는 것보다는 오늘 내가 할 줄 아는 영어만으로 한정된 일상을 견딘다. 힘들고 돈 들고 신경 쓰이는 일은 조금 회피하거나 미뤄두고 하고 싶은 걸 하는 선택을 한다. 그게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게 체류자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거주자의 입장에서는 살 때 필요한 것들을 먼저 해소하는 것이 우선이 된다는 점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10년 혹은 그 이상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좀 있어보면서 여기가 이민 오기 어떤가 보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아무리 몇 년을 그렇게 지낸들, 신분을 갖추고 일을 하고 가족들을 돌봐야 하는 이민자의 삶은 완전히 다른 수준의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안 되는 것은 성장에 절대적 장벽이다. 나이가 들어서, 대충 마흔 전후? 비영어권으로 이민을 하면, 사실 언어적인 문제는 이민 1세대로서는 해소가 완벽하게 될 수는 없다. 나 역시 인정하고 있고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발전이나 성장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활회화 약간 배우고 사는 수준인 체류자들의 경우와는 천지차이가 있다. 힘은 들어도 뉴스와 신문, 서류를 볼 수 있는 사람과 시장에서 물건 흥정만 가능한 사람의 삶의 질은 현저히 다르다.

이민의 삶은, 이민자의 언어 발전에 따라 주변인들의 관계도 발전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내용의 수준도 폭넓게 올라간다. 어느 정도까지는 분명 비례한다. 그리고 스트레스는 문화에 적응하는 것과 반비례한다. 문화에 적응하느냐 못 하느냐는 얼마나 오픈 마인드인지, 수용하는 태도가 얼마나 개방적인지에 달렸다. 특정 종교나 문화에만 종속된 사람은 그 외의 문화에 적응하기 어렵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무슬림 국가, 혹은 인도 같은 나라에 적응하기 어려운 건 당연하고, 무신론자가 종교국가에 적응하는 것도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일이다. 다양성, 다양성... 한국 사회에서 말은 많이 하는데 한국인은 전 세계적으로 다양성과 가장 거리가 먼 민족이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그런데 이민은 어느 쪽이든 충분히 열린 상태여야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한편, 만 2년 정도 때였던 것 같은데, 영어권 국가가 아닌 이곳도 은행이나 통신사 고객센터 등 공기업이나 절대다수가 사용하는 서비스 기업에 전화를 하면 보통 영어 서비스가 있다. 이민 첫해 그런 곳에 전화를 하면 영어 서비스를 선택해서 문의를 하거나 상담을 받았다. 하지만 영어 상담사가 영어가 현지 영어이기 때문에 사실 영어 서비를 받는 것이 쉽지 않다. 발음도 낯설고 용어도 좀 다르게 쓴다. 게다가 나 역시 코리안이니까. 그런데 2년 차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그런 고객센터 직원의 엉터리(?) 내지 후진(?) 영어로 상담이나 안내를 받는 것보다는 현지어로 상담을 받고 문의를 하는 것이 편하고 더 의사소통이 원활했다. 비록 고객센터에 아무리 내가 외국인이니 쉽게 천천히 해달라고 해도 그들은 개의치 않고 그냥 배려 제로로 마구 쏟아내지만 그래도 그게 훨씬 이해도 쉽고 빨랐다. 현지어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에 뉘앙스를 명확히 하기 위한 영어 단어를 몇 개 섞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영어권이 아닌 국가라면 어디서나, 한국어가 아니라면 영어보다 그 나라 언어가 편해질 때가 언어적으로 적응이 끝난 시점이 아닐까 한다. 의사소통은 내가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상대방도 내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어야 하기에 내 영어실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로컬들을 상대함에 있어서 내가 잘하는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의사소통에 유리할 수는 없다. 혹 내가 영어를 너무 잘해서, 내 영어는 네이티브 수준이라 현지어로 영어만큼 소통하는데 너무 오래 걸릴 것이라는 것은 대방의 언어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예측/판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박사와 중졸 노동자가 대화할 때 소통이 안 되는 건 학력이 낮은 노동자 때문이 아니다. 손뼉이 안 맞는 건 양쪽 책임인데, 저 경우 문제는 나지 현지인이 아닌 것이다.

전에 한 1세대 아이돌 그룹의 a가 이런 말을 했다. 요약하면, 연습생 때 죽어라고 노력한 걸로 데뷔해서 은퇴까지 먹고사는 거라고, 사실 데뷔하고 난 후에는 실력면에서 별로 느는 것은 없다고. 이유는 그때부터는 '생계'이기 때문이다. 연습, 노력은 준비 단계에서의 것이고 이후는 실전이다. 실전은 돌아볼 틈이 없다. 이민 후 1-2년에 학습한 언어가 이후 이민 생활을 좌지우지한다. 1-2년에 언어에 진보가 없다면 이후 생계, 생업을 해나가는 사람은 언어에 쏟아부을 노력이나 시간이 없다. (뭐, 돈이 넘쳐나고 여기에 더해 자식에게 매일 있는 돈으로 놀고먹는 삶을 보여줘도 자식 교육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예외로 하겠다. 그런데 교육의 1순위는 가정교육이다.)


결론을 이미 줄줄이 쓴 셈이지만,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나라 이야기, 우리나라 현대사를 이야기하며 압축 경제성장의 대가를 치른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곤 한다.

이민자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전술한 것처럼 이민 후 성장하고 발전하는 단계가 마치 아기가 어른이 되는 과정을 2-4년 안에 압축해서 경험하는 것이기에 신체적/정신적/감정적으로, 그리고 환경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쩌면 나 역시 아직도 그 과정에 있는지 모른다. 10년 차가 되어서 또 '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매년 나아진다는 것이다.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분명히 하기만 하면 매년 나아진다. 중요한 것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다. 내가 노력하기만 하면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수 있다. 한국에서 어지간해서는 보장받기 어려운 것이 이것 아닐까.

이민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어디든 이러한 것에 대한 각오와 생각을 단단히 하는 것이 좋다. 생각에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어려운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견고해지고 고지식해지고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 강함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속도에도 20대 초반의 나와 30대 중후반의 나는 다르다. 30대만 해도 암기력과 집중력이 현저히 차이가 난다는 걸 느꼈다.

이민을 꿈꾼다면, 아니 언젠가의 선택지의 하나에 올려놓은 사람이 있다면 이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더불어 지금의 코로나 판데믹 시대. 이 시기에도 불안하다며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사는 곳을 지키고 일상을 사는 이민자들이 있다. 제대로 정착하고 한국에서 살 때와 똑같이 살고 있다면 천재지변으로 거주하던 집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생계가 있는 곳을 떠날 수는 없다. 기대는 직원들이 있고 이미 뿌리내린  곳이다. 이렇게 자리한 이민은 분갈이하듯 쉽게 옮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래도 괜찮다. 어쩌면 이런 것이 무엇보다 현지에 잘 적응하고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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