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세월을 품은 경주, 그 곳에서 만난 것들
초등학교 때 한 번쯤은 수학여행으로 경주를 가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멋 모르고 친구들이랑 같이 놀러간다는 사실이 더 즐거웠던 수학여행. 관광버스를 타고 이 곳 저 곳을 다니면서 아는 것은 없지만 자기 몸보다 몇 십, 몇 백 배는 큰 유적들을 선생님들의 인도에 따라 정신없이 구경했던, 혹은 보는 둥 마는 둥 스쳐 지나갔던 어린 날의 기억들이 아주 조금씩은 머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의 그런 희미한 기억 한 줌을 가지고서 다시 경주에 방문했다. 12년의 세월이 지나고, 머리도 몸도 조금은 더 성장해서 비로소 천 년의 고도, 경주로 다시 돌아왔다.
사실 경주 같은 지역은 혼자 여행 다니기에는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다. 다른 지역처럼 구경을 다닐만한 곳이 자연경관이 근사한 것도 아니고, 소위 말하는 '맛집'들이 즐비한 곳도 아닌데다가 어렸을 때 한 번쯤은 다 가본 곳이라 또 가긴 애매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경주를 간 이유는 단순히 한국사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그동안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책 속에 실린 작은 사진들로만 접해 왔던 유물과 유적들, 그리고 단순히 텍스트 혹은 시험 문제로만 접했던 역사적 스토리들을 나이가 먹고 머리가 조금 더 굵어진 지금, 실제로 마주하게 된다면 조금 더 입체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경주행 무궁화호에 올라타는 데 한 몫했다.
한참을 무궁화호 특유의 딱딱한 좌석에 몸을 구겨 앉고 몇 시간을 달려서야 경주역에 도착했다. 하얀 기와지붕으로 잘 정리정돈 된 경주역사(驛舍)는 전반적인 분위기부터 역사유적지구에 어울리게 고풍스럽고 옛스러운 컨셉을 잘 유지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고풍스런 건물 앞에서 낮부터 거하게 술에 취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되도 않는 일장연설을 구구절절 늘어놓으시는 저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말이지.
경주역 앞 횡단보도에서 바라본 경주는 크고 작은 기념품 가게들과 크고 작은 가게들이 거리에 즐비해 있는 것이 어느 도시에 왔다기 보다는 테마파크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뭐 '경주 역사유적지구'니까 역사를 주제로 한 테마파크라고 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다른 지역의 기차역 앞에서는 느끼기 힘든 북적북적하고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었다.
한참을 지도 어플을 들여다 보며 더듬더듬 역사지구를 찾아 헤멘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이윽고 눈 앞에 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크고 아름다운 고분들이 펼쳐졌다. 식리총,금령총... 천마총처럼 낯익은 이름들은 아니다. 대부분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거나 고분에서 발굴된 일부 유물들로 주인을 어렴풋이 추측할 뿐인 무덤들이다.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교과서에 한 줄도 제대로 실리지 않거나 혹은 시험 문제에 나오지 않는 이 고분들은 천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자신의 가치를 단순히 책 속 텍스트에 한정지을 수 없다는 듯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EBS에서 한국사 강의를 하시는 최태성 선생님이 수업 중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중에 여러분들이 이 강의를 듣고 어디든간에 유적지를 꼭 한 번 가보세요. 탑이 됐든, 고분이 됐든 상관 없습니다. 그냥 그 곳에 가서 차분하게 조금 긴 시간동안 그 모습들을 음미하고 감상해보세요."
그 말처럼 한참을 금령총 앞에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신라시대의 역사에 대해서 깊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그저 스쳐 지나갔을 이 고분들을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리고 그의 나이조차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신라의 어린 왕족이 어떤 연유로 이른 나이에 삶을 마감하고 이 곳에 이토록 커다란 무덤을 세운 것일까. 역사책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수 천년의 역사가 품기에는 어쩌면 지나치게 사소한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제대로 꽃송이조차 피워보지 못하고 이 곳 경주에 묻혔을 아이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아이의 뒷모습이 아주 조금 어른거렸다.
당신이 만약 어디든 여행을 떠난다면, 하물며 그 곳이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라면, 그 곳에 대해 조금은 공부하고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주 약간의 배경지식이라도 그 곳과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훌륭한 소재거리가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여행의 추억은 들고 간 가이드북이 만들어주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