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고리는 영원히 돌고 돈다.
식리총과 금령총을 뒤로 하고, 역사 지구 곳곳을 훑으며 걸어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주역사지구 내에서 고분의 규모가 제일 큰 천마총이 눈에 들어왔다. 철없던 초등학생 시절, 저기 위에 올라가면 재밌겠다라고(?) 생각했던 그 천마총이었다. 고분 중에 유일하게 내부를 확인할 수 있는 천마총은 무덤이라기보다 작은 박물관 같았다. 천마총의 이름이 된 '천마도' 외에도 천마총의 상징과도 같은 금관도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드라마에서 선덕여왕이 머리에 쓰고 있던 그 금관 말이다.
참 희한한 건 경주 역사 지구 내에 있는 대부분의 고분들이나 유물들은 어느 왕의 것인지, 어느 왕족의 것인지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대부분은 건설되거나 제작된 대략적인 시기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천마총의 경우에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음에도 어느 왕의 무덤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무덤의 구조가 법흥왕 이전의 모습이고, 방사성 원소의 측정과 무덤의 규모와 금관이 발견된 것을 통해 아마도 지증왕의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왜인지 경주 역사 지구의 모든 무덤들이 무연고자들의 무덤인 것 같아 조금 슬퍼졌다. 신라나 통일 신라의 경우에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비교적 사료도 많고, 유물, 유적들도 많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밝혀진 게 없는 걸 보면 고구려나 백제의 역사는 온전히 밝혀지려면 앞으로 한 세기는 더 기다려야겠지 싶었다.
천마총에서의 이런저런 생각들을 잠시 넣어두고 드넓은 역사 지구를 사부작사부작 걸어다녔다. 문득 저 쪽에서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 사진을 찍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첨성대였다. 석가탑, 다보탑과 함께 경주를 상징하는 유적이자, 이런저런 매체들을 통해 가장 많이 그 모습을 접했을 첨성대. 드넓은 풀밭에 덩그러니 놓여진 첨성대는 어렸을 때 봤던, 혹은 교과서에서 보던 위풍당당한 모습에 비해 조금 초라해보였다. 십 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 그 때보다 내가 더 커진 탓일까. 기억 속의 첨성대라면 그저 크고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기대감이 바람 빠진 풍선마냥 쪼그라들었다.
역사 지구를 한참 돌아다니다 보니 오후 3시가 넘어간다. 여기까지 왔는데 불국사는 들렀다 와야 하지 않겠나 싶은 생각에 부랴부랴 경주역에서 불국사역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불국사역은 정말 간이역처럼 작은 역이었다. 불국사를 오가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여서 그런지, 불국사역 주변은 휑한 구석이 있었다. 4차선 도로와 작은 편의점을 제외하면 역 앞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불국사역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면 도착하는 불국사는 매표소에서 5000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국가가 관리하는 다른 관광지, 이를테면 성산일출봉 같은 곳에 비해서 좀 비싸다 싶은 입장료다. 보통 불국사에 오게 되면 석굴암도 같이 구경하는 편인데, 내가 갔을 때는 오후 5시가 넘었던 지라, 불국사만 보고 나오는 데도 빡빡한 시간이였다. (석굴암은 불국사에서 산 타고 30분을 더 가야한다.)
솔직히 어렸을 적의 불국사에 대한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불국사에 오긴 했을 텐데 뮐 봤는지 잘 기억이 안나더라. 기념품 가게에서 연한 회색의 석가탑, 진한 흑색의 다보탑 미니어처를 사서 집에다가 진열했던 기억만 날 뿐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을 여지껏 한 뼘만한 크기의 기념품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나에게 실제로 마주한 석가탑과 다보탑은 드디어 실물로 보게 됐다는 반가움과 익숙함이 더 컸다. 초등학교 때 책에서 봤던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었던 석가탑과 어렸을 때 기념품으로 사왔던 미니어처 중에서 더 화려하고 예뻐 보여서 더 좋아했던 다보탑. 책장 위에 올려놓고 심심할 때마다 보곤 했던 그 탑들을 1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 곳 불국사에서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부처는 사람과 사람 간의 인연에는 필연적으로 관계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물며 사람을 스쳐 지나간 사물, 장소에도 그런 인연이 있으리라. 초등학교 때 고작 2박 3일동안 머물렀던 경주였지만, 십 여년이 지나 다시 돌아오게 된 것도 그런 사소한 인연의 연장선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