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정동진까지 8시간 (1)

근성열차와 함께 영동선 끝자락에서

by Writing Ko

매 해 마지막 날만 되면 인근 숙소들의 모든 방들이 예약되고, 왕복 기차표까지 모두 매진되는 기적을 보여주는 지역, 정동진. 일출이라 해봐야 하루에 한 번, 1년에 365번 뜨는 일출인데 새삼스레 새해 첫 일출이라고 구경가는 사람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 생각한다. 여지껏 한 세 번정도 일출보겠다고 각오하고 정동진을 갔었지만, 단 한 번도 새벽에 일어나지 못했다. 뭐 죄다 친구들이랑 술 먹고 자고, 피곤해서 못 일어난 것이지만...

가는 역마다 그 역의 도장들을 찍어왔다. 역무실이나 표 사는 창구 옆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정동진을 간 이유는 하나였다. 부산과 정동진을 잇는 영동선 기차를 타고 종점까지 가기 위해서. 정확히는 부산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 거리에 있는 부전역에서 정동진역까지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강릉역까지 무궁화호와 KTX가 오고 가지만, 2017년 당시에는 평창 올림픽 준비로 강릉역이 개보수 중에 있었기 때문에 강릉역의 전 역인 정동진역이 임시 종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굳이 부산에서 정동진까지, 남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가야하는 이유가 있었다면, 그냥 '우리나라 철도의 종점 정도는 찍고 와야겠다'라는 나사빠진 도전정신 때문이었다. 호남선의 종점 목포, 경부선의 종점 부산, 경전선의 종점 부전, 영동선의 종점 정동진, 마지막으로 최북단 백마고지까지 찍고 오겠다는 마인드로 이 곳 저 곳을 싸돌아댕겼다. 어떤 지역에서 관광을 하는 것은 기차 타는 시간 이전에 대충 시간을 때우는 목적이었고 주된 컨텐츠는 기차를 타는 것 뿐이었다.

장장 8시간을 기차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

기차를 탄 것도 아무 기차나 탄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운행 시간이 길고, 하루에도 한 두 편 있을까 말까 하는 소위 말하는 '근성열차'들만 골라탔다. 보통 우리나라 철도의 한계로 인해 KTX와 같은 고속열차가 다니지 못하는 지형적으로 험한 지역이나, 열차를 타는 유동인구가 거의 없는 강원도의 산간 지역, 개보수가 제대로 되지 못한 노후된 철로가 다수 존재하는 경전선 같은 노선에 이런 근성열차들이 운행된다. 예를 들어 '청량리-부전', '목포-부전', '부전-정동진' 노선들이 대표적인 근성열차들이다. 기본적으로 편도 8시간 이상 소요되는 근성열차는 압도적인 운행 시간과 한국에서 몇 남지 않은 장시간 기차여행이 가능한 노선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철도 동호인들에게 정복의 대상이다.


기차 좋아하기로는 어렸을 때부터 둘째 가라면 서러운 나였기에 보무도 당당하게 부전역에서 정동진역 가는 무궁화호에 올라탔다. 그리고 장장 8시간 동안 기차 안에서 사육 당하며, 싸들고 온 간식거리를 먹다가 지쳐 잠들고, 창 밖을 구경하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제주도나 일본도 비행기로 한 시간, 배 타면 하루 밖에 안 걸리는데 경상도에서 강원도가 8시간 걸린다는게 믿겨지는가.

사실 부산에서 정동진을 가는데 마음 편하게 고속버스를 타버리면 4~5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8시간이나 걸리는 무궁화호를 탄 이유를 묻는다면 '그냥 타고 싶어서'라고 말해야겠다. 놀이공원에서 무서운 놀이기구를 굳이 타는 이유랑 비슷하다. 뭐 옛날에 서울에서 부산가는 비둘기호가 12시간 넘게 걸렸던 걸 생각하면 8시간 걸리는 이 열차는 KTX로 부산을 편도 2시간에 돌파하는 요즘 세상에서 사실상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느림의 미학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차다.


한참을 기차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잤을 무렵, 강원도 산간지역을 지나는 태백선을 지나, 바다를 맞대고 달리는 동해선 구간에 진입했다. 이제 좀 있으면 아침부터 경상도와 충청도를 가로 질러 달리던 무궁화호는 묵호를 지나, 정동진역에 도착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궁화호의 낡은 스피커 틈으로 지난 몇 십 년동안 들어왔던 차장님의 굵은 음성이 흘러 나온다.

바다가 코 앞에서 출렁이는 정동진역 만의 매력이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종착역인 정동진, 정동진역에 도착합니다. 잊고 내리시는 물건이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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