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정동진까지 8시간 (2)

바다 위에서 그대와 함께 트로트를

by Writing Ko

정동진역에 도착하고 8시간 동안 제대로 펴지 못한 허리와 기지개를 마음껏 펴고 울타리 너머 바다와 마주했다. 날씨가 영 심상찮다. 웬일로 파도가 조금 높게 친다 싶더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우중충하고 물안개가 짙게 껴서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뭐 어찌됐든 8시간 걸려서 정동진까지 왔으니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래도 뭔가 다른 걸 구경하러 돌아다녀야 할 것 같은 찝찝한 마음은 숨길 수가 없다. 시간이 된다면 강릉이라도 짧게 구경해볼까 하고 생각했지만, 정동진역에서 강릉 넘어가는 버스도 끊긴 데다가 강릉에서 정동진으로 넘어오는 교통편도 밤에는 없는 것 같았다. 정동진역 앞 레일바이크는 비바람이 치고 파도가 넘실거리는 날씨 꼬락서니 때문에 당연히 운행 중지인 상태였다.

파도가 몰려올 것 같은 그런 날씨였다.

으음. 뭐 어쩔 수 없지. 여기까지 왔는데 밥이나 먹자. 대충 정동진역 근처를 돌아다니다 보니 초당순두부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다른 가게들은 5만원이 훌쩍 넘는 비싼 회 같은 것만 파는지라, 얄팍한 지갑을 들고 다니는 나로서는 딱히 선택권이 없었다. 조심스레 '저기요?'하고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어지는 뻔한 질문. '몇 분이세요?' '한 명이요'. 혼자 밥 먹는 게 딱히 어색하거나 민망하지는 않지만, 혼자 들어왔을때 듣는 몇 분이냐고 묻는 저 질문은 도통 적응이 되지 않는다.


레일바이크는 어디로 간 걸까.

순두부정식을 하나 시켜놓고, 의자에 걸터 앉았다. 내일 아침에 해돋이나 볼까?심히 게으른 인간인지라 여지껏 한 번도 해돋이를 보지 못 한 게 영 아쉬웠다. 내일은 좀 여유롭게 일어나서 해돋이를 봐야하나 싶었지만, 밖에 날씨를 보아하니 내일 아침까지도 우중충할 것만 같다. 일찍 일어나봐야 잠도 못 자고, 해돋이도 못 보는 슬픈 상황이 연출될 것만 같아 지레 포기했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 멍하니 가게 밖을 보고만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아주머니가 순두부 한 뚝배기를 식탁에 올려놓으셨다. 허여멀건한 초당순두부를 한 숟갈떠서 간장을 살짝 비벼 입 속에 집어넣었다. 그런 대로 먹을 만 했다. 강릉에서는 유명한 음식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 이름만 어렴풋이 들었던 초당 순두부. 강릉에서는 조금 멀리 떨어진 이 곳 정동진에서야 겨우 한 입을 먹을 수 있었다. 옛날에 학교 급식에서 손바닥만한 크기의 연두부에 간장을 비벼 먹는 그런 맛이었다. 다만 지금 먹는 건 따뜻한 연두부라는 차이가 있지만. 익숙한 급식의 맛을 음미하며 매우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고나서야 깨달았다. 사진을 안 찍었다는 것을.


이렇게 된 이상 뭐가 됐든 정동진 해수욕장은 갔다 와야 겠다. 편의점에서 콜라 한 캔을 사서 해수욕장을 찾아 헤멨다. 비 오고 바람 불고 개판인 날씨를 뚫으며, 이런 날씨에 정동진은 왜 왔을까 하는 얕은 후회와 함께 겨우 모래사장을 밟을 수 있었다. 이런 날씨에도 천막 밑에서 닭꼬치를 파시거나 솜사탕을 파시는 분들이 계셨다. 뭐라도 사 먹을까 지갑을 열어봤지만, 땡전 한 푼 없다. 있는 게 뭐야 젠장.

시간이 지날수록 날씨는 점점 안 좋아졌다.

바람이 부는 정동진 앞 바다. 그리고 그 곳 모래사장 위에 설치한 임시 천막 밑에서 여성 가수 한 분이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필시 유명하신 분은 아니리라. 어르신들이 관광버스에서나 부를 법한 70, 80년대 감성의 트로트와 뽕짝을 부르고 계셨던 그 분은 몇 없는 관객들 앞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어떤 이유에서 이 곳까지 와서 노래를 부르고 계셨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주변에 행사가 열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관계자같은 사람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분은 콘서트장에서,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앞에서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유명한 어떤 가수들보다도 자신 앞에서 호응해주고 박수 쳐주는 어르신들 앞에서 즐겁게 노래하고 계셨다.


얇은 빗방울이 드문드문 시야를 가리며, 금방이라도 비가 억수로 쏟아질 것 같은 우중충한 날씨였다. 강원도 끝자락,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정동진 해수욕장의 붉은 천막 아래에서, 그리고 주황빛으로 빛나는 수 십개의 백열 전구들 밑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계셨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익숙한 멜로디의 트로트 노래에 귀를 귀울이며, 회색 빛으로 몰아치는 파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디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특별한 콘서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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